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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r 30. 2021

당신은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나요

책 리뷰 _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오소희)


코로나 시대는 우리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분주한 것들이 있다. 가만히 아파트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점심부터 저녁까지 라이더들이 음식들을 싣고 쉼 없이 달려온다. 급격히 증가한 택배 물량 역시 택배 기사들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과 직장인들도 온라인 수업과 회의로 여전히 분주하다.

침잠하는 것들이 있다. 경기 침체, 실업률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깊이 우울해하고 자기 속으로 깊이 침잠한다.


코로나 시대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나는 이 시기를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코로나는 말 그대로 재난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의미를 갖고 살아야 한다. 조용히 내 안에 삶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좋은 책을 만났다.

여행자 오소희의 새 산문집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생애 첫 집을 짓고 이사하자마자 코로나가 들이닥쳤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게 된 저자의 이야기다.


이 책은 '머묾으로써 떠날 수 있는' 기묘한 여행기이자 정착기이다.

저자는 집을 구상하고 지으면서, 여행지에서의 추억들을 집안 곳곳에 심어둔다. 나무 덧문과 시폰 커튼, 천장 콘크리트를 뚫어 단 해먹. 세월이 깃들어 반질반질한 돌들이 콕콕 박힌 중세 유럽의 포장도로... 타일 시공 아저씨와의 미팅에서 타박을 들어도 저자는 꿋꿋이 '본인만의 집'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하여 머물면서도 어디든 떠날 수 있는 넉넉한 품의 집을 완성하고야 만다.


쉬운 관리도, 가성비도 제2 순위. 오직 인생에 영감을 준 것들로 채워진 집이라니... 심플하고 세련된 신축 아파트와는 매우 동떨어진 감성이다. 하지만 여행자 오소희는 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추억을 수시로 바라볼 수 있게 과감히 집을 꾸릴 일이다.

길에서는 그런 추억을 만들기 위해 과감히 몸을 던질 일이다."

저자는 집에 꾸준히 나다움을 담을 고민을 하고, 그로써 집에 머무는 시간 동안 내가 나다워질 궁리를 한다고 했다. 어쩌면 여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집에 대한 시선일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자유롭고 특별한 삶의 방식 역시 획일화된 한국 사회에서 끝없이 몸부림치고 고뇌하며 얻어낸 것임을, 전작들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세대는 초중고 획일화된 교육체제 안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갔다. 황당하게도 기업들은 입사 서류부터 '당신만의 것'을 드러내 보라고 채근했다. 너만의 특별함을 어필해보라고. 그리고 기지를 발휘해 어찌어찌하여 입사하면 다시 입 다물고 시류에 따를 것을 종용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 비슷한 삶의 양상들은 본인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열심히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으며 영(혼까지)끌(어 모으는)해 찍어낸 듯 똑같은 아파트를 산다. 저자는 묻는다. 그것이 당신만의 것인가. 그 집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늘 모자라는 돈으로 수없이 이사 다니며 전셋집을 전전하던 저자는 드디어 자기만의 집을 만들게 되었다. 진심으로 사랑할만한 집을. 투자 가치, 프리미엄, 편의성... 이런 것들 다 제쳐놓고 '나 다운 집'을. 효율적인 집이 아니라 설레게 하는 집을 가꾸어 나간다.

그녀의 취향을 떠나서 집안 곳곳 추억에 빠져들게 하고,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집을 만든다는 것이, 그러한 집에서 '잘 머무르기'를 익히며 내면의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이상적으로 느껴졌다. 특히나 이런 반강제적(?) 집콕 시대에 잘 머무르는 삶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집에 대한 이야기에 더해 여행지에서의 장면 장면들,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들, 다른 국면으로 접어드는 삶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책 구석구석에서 빛나고 있었다.


부지런한 남편 덕분에 일렁이는 마음으로 머물 공간이 생겼다.


결은 많이 다르지만 얼마 전 읽은 고 박완서 작가의 글들이 떠올랐다. 소담하고 촌스러운 꽃들을 마당에 한가득 심어놓고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을 떠올리던 내용이. 나만의 취향으로 가꿔진 것들이 얼마나 애틋할지 부러움 반 궁금한 반이다.

지금의 나 역시 저자의 젊은 시절과 형편이 같다. 전셋집을 전전하며 3 년을 채워 살아본 적이 없다. 집주인의 조카가 신혼집을 구하는데 이사비를 대 줄 테니 계약일 전이라도 나가 달라는 통보에 우리의 첫 집을 눈물로 떠난 적이 있다. (일곱 채의 집을 보유했던 그 집주인은 집을 빼고도 한참이나 이사비 지급을 미루다가 내용증명을 보내겠다는 말에 젊은 사람들이 사람 말을 못 믿고 빡빡하게 군다고 툴툴댔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이사한 적도 있고, 작년엔 집주인이 들어오겠다 하여 그 위층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사할 때마다 전셋집에 돈을 들여 페인트를 칠했고 조금씩 돈을 들여 보수를 했다. 양가 부모님들은 남의 집에 그렇게 돈을 쓰는 것을 마뜩잖게 생각하셨지만 우리에게 집은 '머물기 좋은 곳'이어야 했다. 머무는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공간의 상태와 아주 동떨어질 수는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집에서 마음에 들게 머물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추억이 쌓일 배경을 깨끗하게, 그리고 취향껏 가꿨다. 지금도 남편은 열심히 베란다에 식물을 들이고 의자를 놓고 조명을 달며 우리만의 카페를 꾸미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다짐한 것은 나만의 집을 갖는 것이 먼 일이 될지라도 거대 산업이 제안(강요)하는 취향에 타협하지는 말자는 것(특히 베란다 확장!), 지치지 말고 원하는 공간을 계속 꿈꿔보자는 것이다. 책의 제목처럼 떠나지 않고도 행복한 공간에 머물 수 있다면.

코로나에 더해 생전 처음 보는 수치의 놀라운 미세먼지로 강제 집콕인 오늘. 빛나는 삶의 단상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이 '머묾으로써 떠나는' 기묘한 여행기에 배가 부풀도록 한 숨 크게 쉬어 보았다. 마음이라도 자유로운 공간에서.





밑줄 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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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추억을 수시로 바라볼 수 있게 과감히 집을 꾸릴 일이다.

길에서는 그런 추억을 만들기 위해 과감히 몸을 던질 일이다. _ 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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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모종의 설렘을 안고 창문을 연다. 창문 밖을 한참 내다본다. 저녁이면 전등 스위치를 올리고 나무 덧문을 닫기 전 또 한참 창밖을 내다본다. 내게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건 언제나 신비롭고 감사한 일이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기에. _ 1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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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노인이 되었다.

아이는 젊은이가 되었다.

나는 중년이 되었다.

우리의 몸 상태는 끊임 없이 변이하며 사회는 간단한 수식으로 그 상태를 분류한다.

아이와 이야기할 때 나는 종종 젊음에 꼽사리 끼는 기분이 든다.

부모님과 이야기할 때 늙음에 꼽사리 끼는 기분이 들곤 한다.

둘 다 이해할 것 같은 날이 있고

둘 다 이해할 수 없는 날이 있다. _ 1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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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이래로, 나는 늘 내가 참아주고 기다려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부모가 ‘참아주고 기다려준다’는 표현은 우스운 것이다.

무엇을 참고 기다리는가?

자식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기를?

애초에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유예’다. 아들이 자란 세계는 내가 자란 세계와 다르다. 그가 살아갈 세계도 내가 살아갈 세계와 다르다. 아들은 내가 바라는 이상과 다른 자신만의 이상으로 살아갈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피곤할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을 붙잡고 때때로 좌절하고 때때로 성공할 것이다. _ 242-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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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아들에게 쓴 편지 중에서)

좋은 밥과 편안한 잠과 깊은 포옹만 주면 되었을 텐데 그보다 더 많은 게 필요한 줄 알고 어리석게 많이도 뛰어 다녔다. 엄마의 분주했던 어리석음일랑 잊고 좋은 기억만 가져갈 수 있다면. 네가 그럴 수 있다면. _ 2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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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솜인형을 만드는 과정과 같다고.

누군가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꽉꽉 채워 넣어서 그를 더 큰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일.


좋은 공간을 유지하는 것도 솜인형을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고 평범한 공간을 연대의 손길로 꽉꽉 채워 넣어서 더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게 하는 일. _ 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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