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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r 12. 2021

아름다운 동화 한 편, <긴긴밤>

당신에게도 긴긴밤을 함께 할 누군가가 있나요


아주 근사한 영화를 한 편 본 느낌이다.


주인공의 빛나는 눈과 회한 어린 표정, 바람에 흔들리는 긴 풀들의 결까지 모든 것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아름다운 소설, <긴긴밤>. 뭉클한 이야기만큼 풍경의 묘사와 삽입된 그림이 무척 아름답다.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은 이 책은 굳이 분야를 따지자면 어린이책이지만, 어른들의 마음도 뒤흔드는 강력한 이야기다.


어느 날 어린 코뿔소 노든은 가족을 잃은 어린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코끼리 고아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지혜로운 코끼리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평화롭게 자란다. 이 코끼리 고아원에서는 평생을 보내는 코끼리도 있었지만, 다시 바깥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코끼리도 있었다. 노든에게도 선택의 날이 왔고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행운을 빌어주는 코끼리들과 안녕하며 생의 첫 여정을 떠났다.


생애 처음 보는 광경에 황홀해하고 때로 압도되며 길을 떠난 노든. 어느 순간 야생의 삶을 가르쳐준 친구를 만나고 그와 가족이 된다. 아내, 딸과의 더없이 완벽한 날들이 반짝이며 빛났다. 하지만 이 '자유롭고 행복한 코뿔소'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야밤에 몰래 트럭을 타고 온 밀렵꾼들은 노든의 가족을 공격한 것이다. 뿔이 잘린 채 숨을 거둔 아내와 그 딸을 달빛 아래 바라보며 노든은 긴긴밤을 보낸다. 복수심과 분노밖에 남지 않은 노든에게 동물원에서 만난 코뿔소 친구 앙가부는 새로운 꿈을 준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로 악몽에 시달리지 말고 내게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우리 함께 다시 밖으로 나가보자고.


잊을 수 없는 고통의 밤을 보낸 노든에게 앙가부, 그리고 또 같은 동물원에 있던 펭귄 치쿠와 그의 알까지... 여러 차례 우연한 만남이 이어진다. 일단 살아보라고, 긴긴밤 우리 좋은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채근하는 친구들을 만난 노든의 삶은 그렇게 묵직한 고통 속에서도 따뜻한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긴긴밤 | 루리 글 그림 | 문학동네



책을 펼친 자리에서 책을 덮었다. 그만큼 이야기는 강렬했다.

노든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순간에 탄복하기도 하고, 피할 수 없는 묵직한 고통에 깔려 신음하기도 한다. '익은 망고 색'의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와 우정을 나누기도 한다. 또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순간에 같이 긴긴밤을 보내줄 이가 있기에, 그 긴긴밤 서로의 이야기와 함께 온기를 나눌 수 있기에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동화 한 편에서 만남과 이별, 삶을 짓누르는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도 작은 들꽃을 보고 감탄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보았다. 두려워도 나만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의 아름답고 용맹한 뒷모습을 보았다. 어떻게든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 살아갈 힘은 '함께'에 있다는 인생의 순리를 보았다.


이것은 가엾기도 용감하기도, 아름답기도 한 코뿔소 노든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다. 




밑줄 긋기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_ 12p


우리는 호숫가 모래밭에 누웠다. 하늘이 예쁜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거는 무슨 색이라고 불러요?"

"저렇게 예쁜 하늘 색깔에 이름이 있을리가 있겠어?"

"음, 저건 잘 익은 망고 열매 색 같아요. 기억나요? 우리가 그때 먹었던 망고 열매요." _ 98p


<긴긴밤> 속 전언처럼 우리 삶은 더러운 웅덩이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더러운 웅덩이 속에 빛나는 별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이야기한다. 오늘도 "별이 빛나는 더러운 웅덩이"속을 타박타박 걷고 있을 아이들에게 이 책이 작은 버팀목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힘들고 무서워도 도망가지 않고 소리지르고 울면서 똥을 뿌리는 것이 최선임을, 다리나 눈이 불편한 친구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불편한 다리와 눈 옆에 자연스레 서는 것이 순리임을, 그렇게 나와 친구를 지키는 것이 더러운 웅덩이를 별빛같이 만드는 일임을 알고 서로에게 기대어 오늘을 버티고 내일로 힘차게 나아가기를. 그러다 보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인사하게 될 것이다. "코와 부리를 맞대고" 눈과 눈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영혼과 영혼으로. _ 송수연 아동문학평론가의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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