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는 것도 용기라면
읽던 책을 덮었다.
얇고 가벼운 책이지만 두께와 무게를 떠나서 처음 읽어 내려가는 몇 줄이 잘 소화가 안되면 끝까지 그러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문장이 잘 읽히지 않는 것을 붙잡고 억지로 넘기다가 좋은 끝을 본 적이 별로 없다. 한 장 두 장 읽다가 삐끗, 어긋남을 느끼면 그냥 얼른 덮는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인 것 같아요."
요즘 듣는 수업이 있는데, 업계 종사자 분이 이런 말을 했다.
Never Give Up!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야! 이온음료 들고 달려오면서 "이노옴! 나이브한 노옴!!!" 하고 혼내러 올 것 같은 말들 앞에서 주눅 들 때가 있다.
정말이야? 정말 포기하지 않으면 뭐든 될 수 있는 거야?
한창 귀여운 나이 서른일곱이지만 그간의 경험을 비추어봤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원하는 바를 다 이룬다는 보장만 있다면 누가 포기를 하겠는가. 삶에는 적절한 타이밍에 맛을 더하는 한 톨의 조미료 같은 행운이 있는가 하면, 고슬고슬 갓 지은 밥 위로 뿌려지는 재같은 불행이 있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상황 앞에서는 '항복'을 외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어쩌면 더 이로울 지도 모른다.
육아도 역시 선택과 집중의 연속이다.
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은 일찍이 항복! 을 외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가뿐한 마음으로 양육을 할 수 있다. 요즘은 아이에게 행하는 물리적 폭력은 사회적으로 지양하는 분위기다. 나 역시 아이에게는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정신적(언어적)인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부모도 사람인지라 심하게 울고 화를 낼 때,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무례하게 굴 때 이따금 저 배꼽 아래 단전부터 용솟음치는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저... 저만 그런 것 아니죠?) 예전에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나면 이유가 어찌 됐든 죄책감 또한 상당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었다. 그러다 분노가 터지게 되면 쉬이 그쳐지지 않았다. 마치 유체 이탈한 것처럼 본체(?)는 나불나불 온갖 말로 고성을 뿜어대고 있었고, 그걸 1미터가량 떨어져서 지켜보는 내 영혼은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제발 멈추라고, 후회할 말 하지 말라고 애원하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내게 육아란 '다정한 한 때'와 '분노에 사로잡힌 유체이탈'의 반복이었다. 아이에게 화를 낸 날엔 남편에게 폐기물 스티커라도 내밀며 말하고 싶었다. 나 좀 붙여서 저 앞에 내다 줘.
부끄럽지만 아이는 종종 아침의 엄마를 '화 바구니'라고 부른다. 아직 유아기인 아이에게 시간 맞춰 아침 일과를 치르게 하는 것은 쉽지 않기에 나는 달래도 봤다가 이 악물고 복화술도 해봤다가 싸늘해지기도, 화르륵 타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어쩐지 화쟁이, 버럭 엄마 같은 말보다 이 화 바구니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내 마음엔 언제든 어떤 감정이 담긴다는 것. 그것을 생각하니 조금 쌓이면 또 쉽게 비울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아이에게 엄마 바구니에 화가 조금 차는 것 같다고 신호를 주면 아이는 선을 넘을 것 같다가도 힐끗 내 바구니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애교와 태세 전환으로 나의 바구니를 환기시킨다.
좋은 엄마, 넉넉히 받아주는 엄마는 포기한 지 오래다. 성정상 그렇게 하기가 너무 힘들다. 노력하다가 빵- 하고 터지면 노력 안 한 것만 못한 상황이 자꾸만 생겨 너도 나도 속상하다. 그래서 완벽한 엄마 같은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 엄마도 화가 날 수 있고, 못 참을 수 있고, 부족하지만 서로 조율하자고 반반씩 이해하자고 아이에게 들이민다. 참지 않는 대신 크게 화내는 일을 줄이고 있다. 크게 화를 내고 미안함에 두 배 세 배 잘해주는 그런 것 말고, 그냥 작게 작게 혼을 내고 많은 순간 다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엄마로서 부족한 점을 조용히 내려놓는다. 내겐 요리가 또한 그러한데, 아무리 노력해도 남편이 뚝딱뚝딱 차려내는 것 반도 못한 편이라 그냥 식사는 간단히 준비하고 대신 아이와 노는 시간을 많이 갖는 편이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다.
의지박약의 아이콘으로 살면서 다른 부분은 잘도 포기해왔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 그게 잘 안 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니까. 뭐든지 다 좋은 것만 주고 싶으니까. 하지만 엄마이기 앞서 나는 어떤 것은 모자라고 또 어떤 것은 넘치는 사람이다. 넘치는 것은 열심히 부어주고 모자라는 것은 아이에게 양해를 구해본다. 인간 대 인간으로 솔직하게. 나는 완벽한 엄마보다는 가벼운 엄마로 살고 싶다. 적어도 나중에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는 식의 구닥다리 신세한탄 같은 것은 하지 않는 부모가 되고 싶다. 아이에게 동그랗고 큼지막한 부침개를 부쳐줄 수 없다면 손바닥만 하게 반죽을 올리고(부침개 뒤집기 공포증 있음), 맞지 않는 책은 덮어버리면서 미련 없이 가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