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가 하원 하면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단짝 이야기다.
"나 오늘부터 민솔이랑 단짝 하기로 했어." 했다가도 다음 날엔 "엄마, 바뀌었어. 이제 가을이가 내 단짝이야."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단짝이라는 말을 꺼내는데 그게 귀엽고 웃겨서 오늘은 누가 단짝이냐고 먼저 물어보기도 한다.
요 일곱 살 꼬맹이들은 '단짝'이라는 사전적 정의(서로 뜻이 맞거나 매우 친하여 늘 함께 어울리는 사이. 또는 그러한 친구)와는 상관없이 일종의 짝을 만드는 놀이를 하는 듯하다. 아마도 위로 형제가 있는 친구가 '단짝 친구'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음알음 듣고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유년기 아이들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가.
무리에서 거부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 또래에게 관심받고 환영받는 일에 대한 우쭐함. 다 커버린 나라고 모르지 않는다. 친구의 말은 때로 엄마 아빠의 말보다 더 중요하고 마음에 남는다. 선생님 부모님 그 어떤 어른들에게 받는 칭찬보다 친구들의 인정이 더 소중하고 짜릿하다. 나의 아이 역시 이제 그런 것들에 눈을 뜨고 있었다. 소풍 갈 때 옆에 앉는 친구가 누구인지 중요하고, 어울려 노는 친구들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 세우는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일곱 살을 키우는 서른일곱 살의 엄마는 이제 인간관계라는 것에 많이 무뎌졌다. 결국 인생은 스스로 걸어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 역시 성장과정에서 여러 모양의 관계와 수많은 감정들을 겪어왔다. 그 날들을 다 지나고 와서 이제 그 여정을 출발하는 아이를 보자니 기특함 반 짠한 마음 반이다. 그런 아이에게 해주고픈 이야기는 많지만 애써 꿀꺽 삼키곤 한다. 자기 몫의 기쁨과 슬픔을 담담히 받아낼 때 또 훌쩍 클 테니까.
'네 마음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물론 엄마 아빠라 해도 그렇지. 지금은 네 마음에 친구라는 존재가 무지무지 크게 느껴지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정말 서로의 인생을 소중히 여길 인연들은 너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남게 되더라. 너를 소중히 여기는 친구를 만나, 그를 소중히 여기며 지내렴. 사람이라는 것은 없으면 죽을 것 같이 끈끈하다가도 어느 순간 먼지 묻은 스티커처럼 머쓱하게 떨어져 나가기도 해. 인간관계에 너무 허덕이지 말고 너를 가장 소중히 여기며 자신 있게 살아라. 혼자의 시간에서도 재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둘이 되고 셋이 될 때의 기쁨 또한 즐길 수 있단다.'
앞으로 아이는 여러 관계 속에서 빛나는 추억을 쌓아 가기도 할 테고, 깊은 상처에 남몰래 울기도 할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약처럼 발라주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에 모아둔다. 엄마가 뭘 알아! 하고 방문을 벼락같이 닫을지도 모른다는 거의 90%의 확신과 함께.
결국 제힘으로 제 몫의 삶을 껴안아야 할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해본다. 쓸쓸하고 외로울 때 힘이 되고 위로가 돼줄 한 때의 추억, 따뜻한 장면 하나 마련해주는 것 말고는 별달리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일곱 살의 깨 발랄한 단짝 타령에 혼자 잘 사는 법 타령까지 하는 이 엄마, 왠지 모를 헛헛한 마음 달래려면 아무래도 단짝한테 전화 한 통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