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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y 11. 2021

의류수거함 앞에서


아이의 작아진 옷을 정리해 가지고 나왔다.

위아래 세트로 샀던 반팔 반바지, 형님이 선물해준 체크무늬 가디건, 작년 유치원에서 나눠준 여름 원복... 몇 번 안 입은 깨끗한 옷은 세탁해서 지인을 주거나 중고마켓에 팔기도 하지만 옷이 작아질 때쯤이면 온갖 종류의 얼룩은 기본이고, 유치원에서 주짓수라도 하는 건지 심할 경우 여기저기 찢겨있기도 해서 대게 의류수거함으로 직통하게 된다. 그렇게 더는 못 입을 옷을 들고 의류수거함 앞에 서고서도 한참을 망설이다 주춤주춤 내 손에서 떠나보낸다.


처음 아이의 작아진 옷을 정리하던 밤, 나는 옷에다 코를 갖다 대며 눈물을 쏟았다. 아기 옷에서는 희미한 젖비린내가 났다. 분유 얼룩이 남은 아이보리색 내복, 기저귀가 새서 황급히 귀가해 빨았던 첫 외출복, 발끝에 산타 신발이 달린 레드 스트라이프 우주복까지...

아이는 이제 더 큰 사이즈를 입어야 할 만큼 커버렸지만 나는 그 옷들을 누군가에게 줄 수도, 버릴 수도 없어 하염없이 어루만졌다. 팔다리를 흔들며 방긋방긋 옹알이를 하던 날, 갑작스러운 분수토에 남편도 나도 당황해 발을 동동거리던 날, 목도 못 가누는 아이에게 원피스를 입혀놓고 요리조리 사진을 찍던 날. 이 옷들이 우리의 처음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기쁨과 두려움이 얼룩으로 남은 그 작은 옷들을 어루만지다 결국 정리하지 못한 몇 벌은 서랍에 다시 넣고 말았다.


한 사이즈의 시절을 떠나보낸 아기는 숨이 차도록 빠르게 다음 사이즈, 그다음 사이즈의 시절을 맞이했다. 아이의 날들은 "잠깐만!" "저, 저기..!!" 하고 아무리 불러본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광속으로 달려간다. 오늘의 아이는 오늘로 안녕인 것이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하는 아이의 말을 허겁지겁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찍어 두는 것, 작년 이맘때의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아이의 시절들을 바라본다.


아이를 낳고서야 알게 된 감정이다. 한가득 움켜쥐어도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고 마는 모래처럼 흘러가는 날들이 아프도록 아쉽다. 껑충 커있는 아이를 보면 엉성하게 걷고 곧잘 넘어지던 아기의 모습이 흐릿하다. 유행가의 랩까지 청산유수로 소화하는 아이를 보면 어눌한 발음으로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이야기하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우리의 지난날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자꾸만 나는 찍고, 쓰고, 만진다.


오늘은 2020년의 여름을 돌돌 말아 던져 넣고 왔다. 괜히 수거함을 돌아보며 멋쩍게 입맛을 다신다. 잘 가. 여섯 살 너의 여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린 너와 젊은 나의 한때가 또 한 장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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