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직업, 겨울철 가정보육
낮잠도 안자는 5세 아동을 가정보육하고 있자니 하루가 아주 길다. 아침 일곱 시면 기상하는데 아침 먹고 티브이 좀 보고 나는 커피, 아이는 간식을 먹으며 티타임 잠깐, 종이접기 하고, 온갖 인형 꺼내서 상황극 한 판 하고, 할리갈리 하고, 야매 요가 정도 하면 점심시간이다.
"오늘은 뭐 먹을까?" 아이에게 이런저런 메뉴를 제시하다 컨펌이 나면 엉망진창 요리교실 시작이다. 요즘 요리에 취미가 붙은 아이는 온갖 식재료 바닥에 흩뿌려가며 오감놀이를 겸한 식사 준비를 한다. 아이와 정신 쏙 빠지게 요리와 치다꺼리를 하고 식탁에 마주 앉아 그날의 작품을 맛본다. 맛있다면 다행이지만 맛없다며 그릇을 밀어낼 때는 눈 앞이 캄캄해진다. 저 위를 또 뭘로 채워드려야 하나...
삼시 세 끼는 물론, 삼시 설거지, 끼니와 끼니 사이의 간식 시간까지... 부엌데기 풀 패키지 구성은 요리 무식자를 훈련시키려는 신의 뜻인가. 레시피 안 보고 뚝딱 낼 수 있는 메뉴도 몇 개 없는 나도 이렇게 살다 간 요리 대가 심영순 선생님한테 박수갈채받을 것 같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남편 반응이 뻔하지만!)
식사와 청소, 빨래는 루틴이고 그 외의 시간엔 아이와 이런저런 놀이를 하는데 인형놀이, 만들기(공작), 침대에서 조명 켜놓고 방방 뛰며 댄스타임, 여보 놀이 등 그날의 기분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의 시간 네 시.
이제 낮잠을 거의 안자는 아이에게도 약간의 고비가 오는 시간이다. 옷깃만 스쳐도 서로 예민해져서 시비를 건다. 나도 아이와 노는 틈틈 집안일까지 하다 보니 눈밑이 떨려온다. 유혹의 리모컨을 집어 든다. 지쳐 나가떨어진 엄마의 눈치를 슬쩍슬쩍 살피며 아이는 5분만, 5분만 기회를 엿본다.
내적 갈등을 끝내고 티브이를 끈다. 제2차 요리 대전이 펼쳐진다.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본인이 마치 일류 요리사라도 되는 양 거침없이 소금을 들이붓고, 온 사방에 야채를 날리며 볶는다. 아니, 따님... 제이미 올리버 세요? 정신줄을 부여잡고 꼬마 요리사와의 주방장 자리싸움을 한 판 끝내고 마지막 끼니를 때운다. 야호, 주방 해방이다! 주방 해방 내 기분 방방(?)
저녁 놀이를 하며 곁눈질로 시계를 본다. 보고 또 본다. '오케이, 오늘도 9시 이전에 나이스 하게 퇴근하자.' 상사 눈치 보며 가방 싸는 직장인과 흡사하다. 제발 쿨하게 안녕해주소서!
"종이접기 딱 세 개만 접고 치카하자." 하면 아이는 세상 제일 어려워 보이는 종이접기를 고르는 등 취침시간이 가까워올수록 치열한 눈치 게임이 시작된다.
"자는 이모 나왔다!" 우리 집은 항상 라디오를 켜 두는데 여덟 시 라디오 프로의 오프닝이 울리면 나는 하루 중 가장 밝은 목소리로 외친다. 누군가에겐 세상 반가운 사람, 자는 게 그 어떤 것보다 싫은 누군가에겐 저승사자 뺨치는 '자는 이모'가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할렐루야!
자 이제 드디어 끝이 보인다.
누워서 인형을 들고 하루를 마감하는 상황극("오늘 어땠니?", "넌 오늘 뭐했어?" 등의)을 시작한다. 멍멍이 역을 맡은 나는 무조건 5번 이상 오고 가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하암~ 졸려. 잘 자 친구야~ 드르렁크흑드르렁~"
멍멍이가 퇴장하면 이제 엄마와 두런두런 대화타임이다. 역시 말이 길어지지 않도록 잠을 들이부은 목소리를 연기하며 나른하게 이야기해준다.
아이는 잠들기 전 꼭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오늘 재미있었어! 엄마는 재미있었어?"
가지 않는 시곗바늘을 야속해하고, 아이 앞에 앉아 공상에 빠지고, 다음 스케줄을 위해 대충 맞춰주고 놀이를 끝내려던 내가 가장 뜨끔해지는 시간이다. 모든 것이 늘 새롭고 즐거운 아이가 부럽기도 하고, 엄마와의 시간을 즐거워해 줌에 고맙고 사랑스럽다.
이제 두 달 남았다. 아이 어린이집 입학까지.
막막하다 싶다가도 언제 또 이렇게 아이와 무한정 비벼보겠나 싶어(그렇지만 더 비비는 건 안돼... 네이버...) 애틋해지기도 한다.
겨울이라 밖에 나가노는 것도 한계가 있고, 도로 위의 무법자 초보운전이라 어딜 재미있게 다니지도 못하지만 이렇게 이불 깔아 놓고 돌돌말이 멍석 놀이에 세상 행복한 까르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랑스럽고 지루하게 흘러가는 가정보육의 나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