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전문가 Jul 01. 2021

너의 문 앞에서

요즘 일곱 살 딸아이는 자물쇠와 열쇠에 푹 빠져있다. 문구부터 액세서리, 장난감까지 없는 게 없는 가게에서 딱 하나 고르라 하니 고심 끝에 분홍색 다이얼형 자물쇠를 내밀었다. 매일같이 종이에 하트 열쇠, 별 열쇠, 전설의 열쇠 따위를 열심히 그리고 만든다. 친구에게 선물 받은 열쇠 달린 비밀 수첩은 잘 있는지 잊을만하면 챙겨본다. 최근에는 비밀의 문이 여러 개 달려 있는 주얼리 박스에 꽂혔다. 매일 열쇠로 열고 잠그며 정체 모를 희열을 느끼는 듯하다. 이 시크릿 주얼리 박스가 다양한 시리즈로 나온 데다 리뷰도 많은 것을 보면 꼬마 고객들의 니즈를 아주 잘 공략한 모양이다. 


아이는 왜 잠금장치를 좋아할까. 슬슬 부모와 분리되고 또렷한 자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일까. 딸에게 부쩍 ‘사생활’이라는 게 생긴 느낌이다. 복권에 당첨된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람처럼 아이는 자물쇠와 열쇠만 보면 은근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 미소가 “이제 나는 내가 열고 내가 닫아요.” “함부로 열지 마세요!” 하는 선언 같이 느껴진다. ‘나만의 나’가 생긴 것이다. 그런 아이를 보며 엄마로서의 내 태도도 재정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어릴 때는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상황이 힘겨웠다. 가장 안락하고 안전한 집도 아기에게는 위험 요소가 도처에 깔린 곳이었으니까. 아기는 기어 다니며 빨래 건조대를 치발기처럼 물기도 하고, 가만히 있는 가구에 쿵 부딪혀 멍이 들기도 했다. 콘센트를 모두 막고 가구의 딱딱한 모서리마다 스펀지 테이프를 붙였지만 그것으로 모든 사고를 예방할 수는 없었다. 잠깐 한눈을 팔면 소파나 침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창문 틈에 손이 끼기도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거쳐 아기는 어엿한 어린이가 되었다. 이 어린이는 이제 보호보다 자유를 원한다. 

아이에게 한시도 눈을 못 떼 힘들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눈을 떼야하는 게 더 힘들다. 영유아 시절을 몇 년간 지나다 보니 지켜보고 도와주는 것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잠깐 화장실만 가도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와서 거리 두기 좀 해달라고 정색을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건 뭐 머리에 띠만 안 둘렀지 온 몸으로 참견하지 말라고 외친다. 나도 그렇게 우리 엄마를 황당하게 만들며 자랐을 테지만 말이다. 양육자가 되어보니 육아란 고도의 서비스 직이다. 성장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에게 맞춤형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성실한 관찰과 섬세한 대응이 필요하다. 서비스 평가는 고객에게 받듯 나의 부모 됨은 이후 독립한 아이와의 관계에서 확인받게 될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수행 과제는 아이의 주체성을 인정해주면서도 세세한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다. 아이는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나무라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고, 같은 소리를 몇 번 하면 언짢아한다. 눈을 비비고 지금의 아이를 정확히 보자. 이제 한발 물러서 믿어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때가 되었다. ‘나는 나, 너는 너’를 주문처럼 외우며 거리 두기를 연습할 때가 되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깜깜한 밤은 무서우니까 같이 자야 하고, 무거운 가방은 들어줘야 한다. 하나만 해! 하나만! 마음속으로 절규해보지만 어쩌겠는가. 애벌레에서 번데기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지켜보는 수밖에.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나 역시 자물쇠 달린 비밀 일기장을 좋아했던 것 같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나’가 쌓여 그 사람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나만의 세계 속에서 뒹구는 시간은 얼마나 달콤하던가. 점차 비밀스러워지는 모습을 보며 신기하면서도 당황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나는 그동안 말로만 아이를 존중해왔는지 모르겠다. 한 몸으로 지낸 열 달은 이미 지난 지 오래인데. 세상에 울음을 터뜨리며 등장한 순간 너는 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젖을 먹인다는 핑계로, 먹이고 입힌다는 핑계로 오래 잊고 지내온 것은 아닐까. 헛헛한 마음이 불쑥 올라올 때마다 한편으로는 바쁘고 고단한 시기가 끝났다는 사실에 축배를 들기로 한다. 


갓 태어난 아기를 어루만지며 특히 그 엄청나게 부드러운 발바닥에 감탄하곤 했다. 보행 육 년차 어린이의 발바닥은 이제 제법 단단하다. 그 단단한 발로 내게서 멀리 더 멀리 떠나 멋진 곳들을 밟고 설 수 있기를 일단 입으로, 글로 응원한다. 마음까지 그렇게 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건 물론 나만의 비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습 발라당길'을 지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