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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Jun 23. 2021

'상습 발라당길'을 지나며

비 오는 날,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오다가 다리를 시원하게 찢으며 미끄러졌다.

미끄러지고 두리번거리고 머쓱하게 일어선 일련의 과정은 5 초도 안될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다. 무릎에 붙은 마른 꽃송이들과 흙을 떼내며 혼자 바보처럼 웃었다. 이따 넘어진 거 얘기해줘야지.


아이는 엄마가 넘어졌다거나 뭘 쏟았다거나 하는 우당탕탕 사건을 좋아한다. 나의 '우당탕탕'을 목격하면 박수를 치며 웃고, 얘기만 들어도 좋아한다. 아마도 (본인과 가장 가까운) 어른이 자기처럼 실수하거나 어리숙하게 구는 것에서 공감과 위안을 얻는 걸까. 예전에 돌부리에 걸려 거의 로켓 발사되듯 날아간 적이 있었다. 다행히 두 발로 착지해서 다치지 않았다. 그때 아이와 나는 마주 보고 날아가는 줄 알았다고 깔깔깔 웃었다. 아이는 그 지점을 지날 때마다 "엄마 저번에 여기서 날아갈 뻔했잖아."하고 그날을 떠올리며 웃는다. 집에 오는 길, 미끄러진 이야기를 해줬더니 아이는 역시나 웃음이 터졌다.


며칠 날이 습해서 땅이 젖어 있었다. 미끄러운 길을 앞장서 가는 아이가 불안 불안했는데 역시나 코너를 돌자마자 울상을 하고 되돌아온다. 고운 하늘빛 원피스도 겨우 엊그제 빨아둔 신발도 흙투성이다. 아이가 넘어진 곳은 내가 엊그제 미끄러진 곳이었다. 단지를 나서는 길인데, 약간 내리막길인 데다 비 오면 반질반질해지는 종류의 바닥돌이라 상습 발라당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늦게 나온 데다가 흙이 묻었을 뿐 옷이 젖지는 않아서 그냥 가자고 했는데, 아이는 옷을 갈아입고 가겠다고 했다. 짜증이 났다. 아침부터 날은 덥고 등원 시간은 늦었으며 흙투성이가 된 원피스는 하필 니트라 세탁기에 돌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올라오는 욱을 눌러야 했다. 아침에 아이에게 화를 내면 그날은 종일 마음에 먹구름이 뜨기 때문이다. 


엄마랑 손 잡고 같이 가지 왜 혼자 빨리 가느냐고, 왜 그렇게 뛰냐고, 아침에 좀 빨리빨리 준비하지 늦었는데 옷까지 갈아입고 가냐고 머릿속에서 다다다다 타이핑을 치다가 조용히 문서를 닫았다. 엊그제 나도 그 길에서 넘어졌다. 넘어져서 옷을 버렸다면 나라도 다시 들어가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아이는 잘못이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운 것도, 어린이가 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옷을 새로 갈아입히고, 흙 묻은 운동화를 티슈로 대충 닦아 신기고 미끄럽지 않은 길로 돌아서 데려다줬다. 어제부터 입고 가려고 벼르던 옷이 엉망이 되어 못 입게 되었으니 아이가 더 속상하겠지. 나는 작은 손을 꼭 쥐고 일부러 농담을 했다. "엄마 넘어졌다고 엄청 웃더니 너도 이 길에서 넘어졌네!" 아이는 그제야 신이 나서는 "엄마도 나도, 우리 둘 다 여기서 넘어졌어!!" 하고 와하하 웃는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전히 그 '상습 발라당 길'을 지난다. 아이는 그 길이 시작되기 전부터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비장한 표정을 한다. 우리는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발가락에 힘을 준다. 그리고 지뢰밭이라도 지나는 듯 한껏 긴장된 어깨를 올리고 "으으으..." 소리를 내며 살금살금 그 짧은 구간을 지나간다. 내리막길이 끝나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낄낄 웃음이 터진다.


그날 아침 올라오는 짜증을 참은 공이 이렇게 크다. 매일 아침 그 길을 지나며 아이와 웃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두려워진다. 순간적인 감정으로 뱉은 나의 말과 행동이 아이의 기억을 좋게도 나쁘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유년의 기억들은 선명하다. 정확한 사실은 떠오르지 않더라도 그때의 기분만큼은 생생하게 남는다. 어느 여름날의 낮잠처럼, 불어오는 실바람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기억도 있지만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도록 아찔하고, 눈가가 뜨겁도록 무안했던 기억도 내 마음 어딘가에 놓여 있다. 부모가 되어보니 어른이라는 존재는 아이에게 웃음을 주기도, 상처를 주기도 너무 쉽다.

아이 마음속에 '넘어지고 혼났던 아침' 대신 '상습 발라당 길'을 만들어주는 건 나의 몫이다. 이 어렵고도 행복한 숙제가 늘 내 앞에 놓여있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뭘까. 기분 좋은 아이 웃음을 떠올리며 한편으로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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