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은 웃긴 편이다. 내가 엄마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도 5 프로 정도는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유머와 말 센스가 있다. 온몸으로 '나 지금 당신을 웃기고 있어요' 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요리조리 눈을 굴리며 기다리다가 적재적소에 툭하고 내뱉으면 빵 하고 터지는 그런 개그감이 있다.
애석하게도 그걸 아는 것은 나와 남편뿐이다. 그녀는 지독하게 수줍음이 많기 때문이다. 길가다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인사할 생각에 100m 전부터 초조해지고, 상대방이 좀 적극적으로 반가운 척을 하면 급기야 잔뜩 긴장한 등을 돌려 벽을 마주하고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그런 아이는 의외로 개그맨이나 연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 어린이들에게 영상 매체에 나오는 사람들이란 곧잘 선망의 대상이 되긴 하니 언제까지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유재석을 보며 유재석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또 진짜도 아닌 상황을 진짜 같이 눈물도 흘리고 당황하고 행복해하는 배우들을 신기해하며 자신도 언젠가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최근에는 뺨을 셀프로 때리고 고개를 돌리며 아! 네가 때렸지? 아! 또 때려? 아! 아! 하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이며 자신을 갈고 닦고 있다.(...) 그렇게 세상 들떠서 뭔가를 연구하다가도 어느 날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며 자기는 절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고도 한다. 나처럼 수줍은 성격은 그런 거 못해. 못할 것 같아.
나는 그럴 때마다 유재석 이야기를 해주곤 한다. 국민 엠씨답게 그의 시작은 이런저런 방송에서 많이 보여준다.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개그 무대에 서고 덜덜 떨며 인터뷰를 하던 모습. 지금은 안정적인 진행을 하고 편안한 웃음을 이끌어내는 최고의 예능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본인은 내향적이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기질 검사에서도 방송과 잘 안 맞는 결과가 나왔다며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한다고.
아이에게 유재석 아저씨도 수줍은 성격이라고,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꾸준히 도전하고 개발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하자 아이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진다. 아, 내가 좋아하는 새싹같이 싱그러운 미소.
나는 아이에게 용기를 주려고 유재석 이야기를 한 게 아니다. 정말로 아이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얼마든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린이가 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어. 어린이는 초록도 빨강도 아주 까만색도 될 수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린이는 정말 그렇다고 믿는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니, 나라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리란 법 있나.
아이한테만 "야 너두 할 수 있어" 하다가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의 나는 비록 눈 옆으로 인중 양 아래쪽으로 여기저기 오솔길이 난 피부에, 어쩐지 세상사에 치여 패색이 깊어 보이는 안색이지만 세월의 흔적일랑 애초에 없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어본다. 외친다. 주먹을 굳게 쥐고 "야, 너두 할 수 있어."
거울 속 중년 여성은 약간 당황한 듯 '뭐.. 뭘?' 하는 눈빛이지만 아잇 모르겠다. 그래 뭐 아무거나. 5 키로 빠진 다음 달의 나 자신 또는 느지막이 성공하는 작가? 아니면 한 끼에 먹고 싶은 메뉴 세 개 시킬 수 있는 부자 뭐 그런 거? 뭔진 모르겠지만 거울에 느끼한 눈빛을 하고 "야 너두"를 던지고 본다.
신비하다. 말이란 건 내가 뱉으면서 들으니 상대방뿐 아니라 내 마음속으로도 쑥 내려가 어딘가에 심긴다. 내일을 긍정하는 말, 꿈을 꾸고 빛을 내는 말을 어린이 덕분에 나도 나눠먹을 수 있으니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