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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Jul 15. 2021

딩동 거리며 용기를 주는 소리들

나는 매일 피아노 학원 앞에서 딸을 기다린다.

아이는 레슨이 끝나자마자 나올 때도 있고 언니들과 노느라 십 분 이십 분 늦게 나올 때도 있다. 학원은 3 층. 계단을 타고 건물 아래까지 들려오는 다양한 연주 소리를 듣는 것이 기다리는 재미라면 재미다. 보통 한 곡을 여러 번 연습해야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으므로 보름 넘게 같은 곡들이 같은 시간대에 들려온다. 


선정곡은 다양하다. 

인기 걸그룹의 여름 노래는 꽤 오래 연습했는지 막힘 없이 이어지는 연주가 시원하다. 좋아하는 가수의 곡을 자유자재로 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피아노를 잠깐 배우며 교본에 있는 곡 외에는 쳐본 적 없는 나로서는 꽤 해방감을 주는 연주다. 아이의 핫핑크색 썬 캡을 들고 기다리는 나는 발가락을 들썩이며 내적 댄스로 화답한다.

그런가 하면 추억의 만화 둘리 주제가도 자주 들려온다. 요즘 아이들이 둘리를 아는 게 신기하다. '흠, 녀석 제법인데!' 하면서 마음속으로 한 소절 따라 부른다. 요리보고 저리 봐도 음음.

우리 딸이 요즘 격렬하게 연습하는 '고양이의 춤'도 빠질 수 없다. 피아노를 배운 지 얼마 안 된 아이는 아직 악보를 보는 것도 쉽지 않지만 간단히 뽐낼만한 곡을 익혀두었다. "너 이거 칠 수 있어?" "당연하지." 지금 아이에게 피아노란 그런 것이다. 으쓱 턱을 치켜들고 한 수 보여주고 싶은 것. 우다다다 박자 무시하고 무진장 빨리 친다. 아무래도 빨리 치면 잘 친다고 생각되나 보다. 박자 맞춰서 한 음 한 음 또박또박 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아무리 말 해도 소용없다. 집에서도 그렇게 치기 때문에 아이의 바쁜 눈과 손이 생각나 피식 웃는다.


우당탕탕 고양이의 춤에 당황한 고양이


이렇게 아이들은 교본에 있는 곡 말고도 본인이 치고 싶은 곡을 부지런히 연습한다. 소리는 당연히 월요일보다 목요일이 훨씬 매끄럽다. 막힘 없이 흘러가는 연주를 듣고 있자면 아이들의 신난 손가락과 표정이 눈에 선하다. 다양한 연주곡들을 듣고 있으면 잘 치고 못 치고를 떠나서 그 과정 자체가 즐겁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치는 게 아니라서 그럴까. 어쩌면 연주자는 더딘 진도가 답답하거나 틀린 데서 또 틀리는 게 짜증 날 수도 있겠지만 학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은 내게 무척이나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순간이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시도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타성에 젖은 어른은 학원 앞에 가만히 서서 해방감을 느낀다. 어느 순간 남의 시선 상관없이 오롯이 본인의 즐거움에 몰두하는 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글을 쓰다가도 자기 검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나를 어떻게 볼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때로는 그런 생각들에 매여 억지스러운 결과물을 내기도 한다. 그런 내게 아이들이 들려주는 저마다의 연주는 용기를 준다. 내 소리가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가 닿으면 더 좋겠지만 일단 내 귀에 좋게 들리면 그것대로 기쁜 일 아니겠냐고. 월요일보다 목요일에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니냐고. 부서지는 파도처럼 청량한 걸그룹의 여름 노래와 어쩐지 애달픈 둘리 주제가 그리고 분명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고양이의 춤은 그렇게 딩동 거리며 오늘의 나를 북돋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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