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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Dec 15. 2021

놀란 가슴을 애써 숨기던 저녁에

별일 없는 오후였다.

성미 급한 겨울의 해는 조금씩 저물며 뭉근한 빛을 내고 있었고, 아이와 나는 식탁에 앉아 크리스마스 스노볼 만들기를 하던 참이었다. 정제수와 글리세린을 섞어 유리병에 넣고 작은 루돌프 피규어를 뚜껑에 단단히 붙였다. 신이 난 아이가 병 안을 둥실둥실 떠 다닐 반짝이 가루를 넣는 순간, 기묘한 느낌과 함께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진동. 지진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서귀포 서남쪽 바다에서 4.9 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재난 문자를 보고 나는 아이와 간단히 채비를 하고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겁이 많아 뭐든 조심하고 경계하는 아이가 많이 놀랐다. 책장이 흔들렸다며 나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사실 나도 많이 놀랐다. 지진을 몸소 느껴본 게 처음이라서.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나는 불안이 가득한 아이를 안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토닥였다. 긴장을 풀어주려고 우스꽝스럽게 뛰고 철봉에 매달리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졌다. 놀이터 구석에 근심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딸은 별 철없는 사람 다 봤다는 표정으로 "나 지금 심란해서 놀 기분 아니야."라고 말했다.

퇴근한 남편과 저녁밥을 먹으면서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지진 이야기는 일부러 피했다.


집에 와서도 잠깐 베란다에 나가거나 주방에 가면 자기 옆에 꼭 붙어 있으라며 무서워하던 아이는 저녁 내내 긴장해서 일까, 생각보다 일찍 잠들었다. 아이가 잠들고 나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놀라고 무서웠던 마음이 그제야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아이가 없을 때는 어떻게 느끼든 마음껏 감정 표현을   있었지만, 이제 짐짓  그런 척을 해야한다. 무섭지 않은 , 걱정하지 않는 ... 그것은 부모인 나의 당연한 의무. 감사하게도 아이를 키워온 일곱  동안 무탈한 일상을 보내온 터라 몰랐다. 앞으로의 삶이  어떤 지각변동으로 나를 흔들지 모른다 생각하니 부모의 길이란   무겁고 외롭게 느껴졌다. 지킬  있다는 사실은 종종 이렇게  정신을 서늘하게 한다. 울고 웃으며 사랑하는 순간들을 위해 나는 어떤 각오로 살아야 하나 지끈거리는 머리로 멀리까지 다녀와 버린 저녁이었다.


일상이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있나.

내 생명도 관계도 물질도 견고 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는데 난 무엇을 그리 장담하며 살아가는 걸까. 몇 초간의 떨림에 아직까지도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돈다.

순간을 산다. 일 분 일 초 후의 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개미 같은 삶을 산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 허약한 일상을 부지런히 따뜻한 포옹과 눈 맞춤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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