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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Jan 12. 2019

궁상과 알뜰 사이

엄마의 중고 거래

“작은 게 문제지, 큰 게 문젠 가요?”


천 원이라고 써붙여진 가격표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아이에게 살짝 커 보이 긴 했지만 하얀색, 빨간색 조합이 산뜻한 야구 점퍼였다. 다른 이의 손에 들리기 전에 일단 얼른 집어 들고 볼 일이다. 특히 중고 코너를 지나는 사람들은 번개 같이 집어 들고 천둥 같이 외쳤다. "이거 얼마예요?!"

두 손으로 옷을 펴 들고 우리 꼬맹이 등짝을 눈으로 그려본다. 좀 클 것 같아 판매자에게 사이즈를 물어보니 마음에 꼭 드는,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작은 게 문제지, 큰 게 문젠 가요?” 


그랬다. 아이는 자고 일어나면 커 있었다. 계절을 맞아 새로 산 옷은 그야말로 계절이 저물며 제 기능을 상실했다. 배꼽이 까꿍 나왔고 팔목이며 발목이 숭덩 드러났다. 그렇다면 한 사이즈를 크게 사볼까? 그건 또 산 직후엔 맞춤은 아니었고, 다음 해엔 작았다.  


2 년째 입고 있는 천 원짜리 야구 점퍼


아이를 키우며 이런저런 돈이 많이 드니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에게 철마다 옷과 내복을 사 입힐 순 없었다. 나는 동네 엄마들의 육아용품 벼룩시장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지역마다 맘 카페가 있고, 또 그 안에서 온오프라인 판매 및 나눔이 활발하다. 지금은 떠나왔지만 두어 달 전에 살던 동네만 해도 연 2회 정기적인 육아용품 벼룩시장이 열렸고, 매주 두 번 카페 게시판에 판매글을 올려 이런저런 거래를 할 수 있었다. 판매하긴 그렇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들은 필요한 엄마들에게 '드림'이라는 이름으로 나누었다. '맘 카페'와 관련된 사회적 문제들도 많지만, 엄마들끼리 물건을 저렴히 사고팔고, 나누는 것은 인정할만한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재미 삼아 가 본 동네 프리마켓은 (한철 입힐 만큼) 멀쩡하고 싼 옷의 향연이었다. 처음엔 여름에 집에서 편히 입힐 티셔츠 몇 장과 모자 같은 것으로 시작했지만 몇 번 가보다 보니 '싸고 괜찮은 것을 샀다'는 도취, '알뜰살뜰 정주부'라는 감흥에 빠져 나중에는 외투, 신발, 아이 장난감까지 괜찮다 싶으면 사재 끼기 시작했다. 


옆에서 같이 옷무덤을 뒤적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왠지 불안해서 대충 가격만 보고 싸면 일단 집어 들었다. 어느 날은 아이 신발이 마땅치 않던 중에 딱 맞는 사이즈의 운동화를 발견했다. 딱 맞는 '사이즈'라기보다 마음에 딱 든 '가격'이 문제였다. 2,000원이라는 딱지가 자체 발광하며 내게 속삭였다.

'날 가져요~ 어차피 쟤 발 내일이면 1mm 더 커져있어~~' 




내 마음속 지지리궁상씨도 함께 버렸다.


아이가 두 돌 무렵이어서 딱히 취향을 고집할 때가 아니었다. 아이는 그저 처음 보는 거면 일단 관심을 보이며 좋아했다. 사이즈도 잘 맞고 무엇보다 가격이 다 한 신발을 자랑삼아 사진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 늘 저렴하고 괜찮은 물건을 사 온다며 나를 추켜세우던 남편도 '...' 의 반응을 숨기지 못했다. 그랬다. 사실은 낡고 누추한 운동화였다. 내 것이었으면 그 멜랑꼴리 한 감정을 쉽게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뭐든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게 엄마 마음이라는데 아이 것을 그렇게 '해치우듯' 사버리고 뿌듯해한 나는 왠지 누추한 운동화처럼 누추해졌다. 결국 며칠 신기다 이건 아니다 남편과 이야기하며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내 마음속 지지리궁상씨도 함께 버렸다.  


지역맘 카페에서 '드림받은' 주방 놀이. 우리 집 장난감 중 활용도 최상이다.


지지리 궁상은 '중고 거래' 그 자체가 아니었다. 싸고 가치 있는 것을 사는 게 중고거래의 핵심일 텐데 나는 그저 가격에 눈이 멀어 있었다. '알뜰하게 산다'는 자부심, 반대로 아이에게 '읃어 온 듯한' 것들을 입힌다는 자격지심까지 복잡다단계피라미드네트워크 영업 중이었던 것이다. 싸고 좋은 것들만 분별하여 샀어도 그런 건강하지 못한 생각은 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예전에 라디오 심리상담코너에서 '중고거래 중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나는 거기까지는 아니지만 발가락 정도는 살짝 적셨던 것이 아닐까 되돌아본다. 지금은 아이가 많이 커서 자기 취향이 확고해지기도 했고, 중고로 사야 한다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신중히 생각해보고 산다. 특히 벼룩시장에서 '묻지 마 이옷줘'의 쓸어담기줌마의 행태는 지양한다. 하지만 아직도 순진한 이 아줌마는 가끔 오천 원의 가격 딱지에 도박판의 유혹을 느낀다. "친구야, 이거 따는 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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