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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Apr 05. 2022

구체적으로 후진 나를 쓰다보면

글을 쓰려다가 맥주를 마셨다.

아니, 정확히는 맥주를 마시면서 글을 쓰다가 노트북을 덮고 본격적으로 마셨다. 내 후진 하루를 낱낱이 적어가며 눈과 손으로 되새김하는 것보다는 맥주를 마시며 자괴하는 편이 간단하기 때문에. 어제는 그렇게 맥주를 마시고 적당히 노곤해져 잠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바로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쓸 말이 많았으므로.

 

어제는 아이의 휴대폰 액정이 깨졌다. (제주도내 초등 저학년에게는 ‘안심알리미’라는 이름으로 문자와 통화가 되는 휴대폰이 보급된다.) 받은 지 열흘도 되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놀다 말고 아이는 본인의 휴대폰을 달라 하더니 가지고 뛰어갔다. 놀 땐 휴대폰 하지 말아라, 보면서 다니지 말아라 여러 번 말했지만 소용없다. 약간은 체념한 채 벤치에 앉아 있는데 나를 다급하게 부르며 다시 뛰어온 아이는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내밀었다. 주머니에서 꺼내다가 떨어뜨렸다며.

이때 오은영 박사님 말처럼 10초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어야 했는데. 이미 나도 모르게 2절 3절 의미 없는 잔소리를 시전하고 있었다. 그러게 놀 때는 가지고 다니지 말랬지. 엄마가 뭐라 그랬어. 왜 잘 놀다가 갑자기 휴대폰을 들고 가. 화는 내지 않았지만 깨진 액정을 바라보며 주절주절 계속 말했다.

아이는 속상한 마음을 숨기고 아이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조금 놀더니 집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 눈물을 터뜨렸다. 눈물을 훔치며 한 마디 한다.

“내 탓도 아닌데 엄마는 왜 그렇게 말해!”

 

예전에 티브이에선가 윤종신이 그런 말을 했다.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이 정말 싫다고. 시행착오를 겪는 사람에게 소금 뿌리는 말. 자기 말이 다 맞고, 자기가 다 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싫다고.

오, 나는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던가.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그 끄덕임을 잊은 사람처럼 ‘엄마가 뭐랬어!’부터 시작해 ‘그럴 줄 알았어’와 ‘그것 봐’ 따위의 말을 종종 내뱉곤 했다.

나도 액정을 깨뜨린 적이 있고, 휴대폰을 잃어버릴 뻔한 적도 있다. 실수고 사고다. 만약 남편이 그랬다면 나는 그렇게 가타부타 말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아이에게 2절 3절 잔소리를 한 배경에는 휴대폰을 끼고 사는 탐탁지 않은 모습, 놀 때는 제발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내 말을 코로 듣는 태도, 아직 휴대폰을 갖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때늦은 나의 우려 등이 있었다. 나도 잠들기 전까지 붙잡고 사는 게 휴대폰이면서 나는 되고 아이는 안 되는 내로남불의 통제 욕구가 은밀히 작동 중이었던 것이다.

 

깨진 채로 보호필름을 붙여 그냥 쓰거나 새로 휴대폰을 해주거나 방법은 간단했다. “속상했겠구나.” 나는 그 한 마디만 하면 되었다. 그러지 못해 종일 마음이 복잡했다. 다행히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변기에 휴대폰을 빠뜨린 경험담을 털어놓는 남편의 너스레에 아이도 나도 조금 마음이 풀렸다.

 



불행히도 소동은 또 있었다.

며칠 전부터 집 앞 놀이터에서 하루 종일 노는 남매가 있는데, 아이와 유치원을 같이 다녔던 친구여서 약간의 안면이 있었다. 넘어져 다치면 밴드도 붙여주고 자전거도 타고 간식도 먹고 하면서 며칠 놀이터에서 같이 놀았다. 그 아이들의 보호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늘 저들끼리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아기 자전거부터 어린이 자전거, 씽씽이까지 주인 없는 것들을 가져와 노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어제는 현관 1층에 있어야 할 아이 자전거가 그들과 함께 놀이터에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야말로 다급히 베란다 창을 열고 그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 자전거 너희가 가져간 거야? 말도 안 하고 친구 자전거를 그냥 가져가면 어떡해?”

 

처음엔 동생이 그랬다고 하던 아이는 내가 재차 묻자 자기도 모른다고, 누가 가져왔는지 본 적 없다고 말했다. 남의 아이들을 무턱대고 혼낼 수 없어 그쯤하고 자전거를 가지고 돌아왔지만 뒤통수가 켕겼다. 며칠 지켜본 바 90%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없었다.

그 아이들의 보호자가 있었다면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 아이들이 미취학과 취학 직후의 나이가 아닌 고학년이었어도 그렇게 했을까?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당연히 그 아이들이 가져갔다고 기정 사실화한 내가 싫었다. 거의 그렇게 확신한다고 해도 상대가 아이여서 쉽게 물을 수 있었던 내가 너무 후지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작고 약하다. 어른들이 그렇다 하면 그렇구나 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제멋대로 구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행동을 다 이해할 순 없어도 그저 좀 지켜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휴대폰 액정부터 자전거까지, 마음에 안 드는 아이들 모습에 왁 하고 터져 나오는 통제 욕구로 그만 후진 어른이 되고 만 하루였다.

 

아이들의 천진하고 티 없는 행동을 필터 없이 보기란 때로 너무 힘들다. 판단하게 되고 나서게 된다. 가끔은 놀이터에 아이들 노는 곳에 있고 싶지 않다. 너무 자세히 보고 듣다 보면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에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이 들었다. 딸을, 아이들을 나와 동일시하려는 마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억지 노력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오늘 종일 ‘애들이란 정말이지…’하는 지긋지긋한 마음이 들었다고 남편에게 털어놓았고 이런 내가 육아 에세이를 썼다는 사실이 또 한 번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노트북을 열고 적어야 했다. 조목조목 나의 후진 이유를 적어야 살 것 같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후진 것도 구체적으로 정확히 파악해야 백전 오십 승이라도 할 것 아닌가.

 

모르겠다. 내일은 좀 더 나은 어른이 될는지.

일보 전진 이보 후퇴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쓸 수 있어 다행이다. 기록은 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알려줄 테니까. 어제의 나보단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 조용히 구체적으로 우울해한다.

 

“기쁨은 언어가 되는 순간 불어나고 슬픔은 언어가 되는 순간 견딜 만한 것이 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불쾌한 감정을 전부 '짜증'으로 뭉뚱그려서 그들이 안갯속 같은 '짜증의 덩어리'에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안갯속에 길을 잃었을 때 오직 안개만을 감각하는 사람은 제자리를 맴돌지만 이슬을 감각하는 사람은 풀과 바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_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김윤주

 

무릎을 치며 즐겁게 읽은 이 책 리뷰를 쓰려다가 구체적으로 구린 나의 하루만 구구절절 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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