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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r 31. 2022

배가 든든해지는 이야기

윤성희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

클라우드 뭐시기로 시작하는 레스토랑들이 있다. 이름처럼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고층 건물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 나는 딱 두 번 그런 곳에 가봤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오빠가 부모님께 제대로 식사를 대접하겠다 해서 한 번, 프러포즈받을 때 한 번. 역시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다. 반짝반짝한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차려입은 서버들의 넘치는 친절을 받으며 먹은 음식들은 어쩐지 식도 근처를 지나 원활히 내려가지 못하고 더부룩한 교통 체증을 일으켰다. 

 

엄마는 디저트를 먹을 때쯤 여기는 물이 제일 맛있다고 해서 모두를 당황케 했다. 아 엄마 제발 상황 봐가면서 솔직할 수는 없는 거야! 나는 곁눈으로 오빠의 표정을 살폈다. 사실 나도 그때 뭘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야경이 통으로 보이는 창 앞에서 셀카를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것만은 확실한데…

프러포즈를 받은 날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나름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한 듯했다. 평소 삼겹살에 소주 먹는 게 우리의 데이트 건만 난데없이 높은 건물 꼭대기에 가자고 하니 모를 수가 있나. 예상한 대로 남편은 연애 시절 사진이 편집된 영상을 보여주며 반지를 내밀었다. 나는 이 전형적인 프러포즈에 화답하듯 약간의 눈물을 흘렸다. 고급 레스토랑과 서프라이즈 이벤트에 ‘고백 받은 여자의 눈물’을 더해 완벽한 클리셰를 완성한 것이다. 수년간 드라마와 영화로 학습된, 파블로브의 조건반사와도 같은 눈물이었다. 비로소 남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우리는 고급 요리와 서비스에 황송한 듯 안절부절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지하철을 타는 것으로 우리는 클리셰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잠실과 일산의 중간 지점에서 화려한 꽃다발을 어색하게 들고 남편과 헤어졌다. 그날의 메뉴 역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집 앞 편의점에서 사이다를 사 먹은 건 확실한데… 식재료를 설명하는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짐짓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이런 걸 먹는다고?!’ 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얼마 전 윤성희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을 읽었다. 윤성희는 내가 꾸준히 좋아하는 소설가인데 그의 작품이 왜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단한 서사도 없고, 빼어나게 아름다운 문장을 많이 쓰는 사람도 아닌데. 이유 없이 좋아서 계속 생각해야 했다. 그 끝에 구름 위의 레스토랑들이 생각났다. 그의 소설은 근사한 야경과 함께 고상하게 썰어 먹는 스테이크보다는 멸치 육수에 오래 지진 묵은지 같아서 좋았다. 꼭꼭 읽어 삼킨 밥과 찬들은 원활하게 뱃속 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나를 든든하게 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어디서 마주칠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게 좋았다. 셔틀버스를 타고 복지 회관에 수영하러 가는 할머니, 절 앞에서 산딸기를 파는 아줌마, 매일 똑같은 옷을 입는 아이… 책을 읽다 보면 오늘 본 할머니가 그 할머니 같고, 매일 혼자 걸어 하교하는 아이가 소설 속 그 아이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이의 마음엔 무엇이 크게 들었을까, 저 이의 사소한 기쁨은 무엇일까 자꾸만 상상하게 되었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사람들 마음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았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구멍 안에서 울고 웃고 상처 입고 때론 크게 점프해서 구멍 밖을 나오기도, 다시 그곳으로 풍덩 뛰어들기도 했다. 가족의 죽음, 가난, 거짓말, 관계… 그런 구멍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람들에게 달린 저마다의 이야기가 애틋하고 우습고 짠하고 아름다웠다. 책을 덮으면 줄거리가 뭔지 정리도 안될 정도로 작은 이야기들임에도 빠져들었던 것은 그게 삶이기 때문이다. 남편만 보면 밉고 가슴이 답답해, 야밤에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이름 모를 아이의 킥보드를 타다 그만 크게 넘어진 할머니, 돈 떼어간 옛 친구에게 같이 남편 회사를 망하게 한 사람들을 찾아가 욕을 해달라 요구하는 중년의 여자…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사이로 큰 슬픔과 명랑한 유머가 규칙 없이 드나들었다. 

 

스무 살 무렵,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 갔을 때 화투를 치고 술을 마시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의아했다. 그런 시절을 거쳐 이제는 슬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웃으면서도 울 수 있음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다양한 삶의 모양이 노인의 주름으로, 누군가의 땀방울로, 나의 별 것 없는 육아 일기로 여기저기에 나뒹군다. 나뒹굴며 일어나는 먼지가 또 제법 뿌옇게 아름답다. 세계를 호령하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지 않아도 우리 삶은 울고 웃고 버티며 나아간다는 것 자체로 근사하다. 

 

나는 반지와 눈물을 주고받던 그날의 어색한 우리보다 마른빨래 앞에 앉아 속옷 좀 새로 사라며 구박하는 오늘의 우리가 좋다. 대단한 사람인 양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보다 밑반찬 리필은 셀프인 백반 맛집이 좋다. 아파트 화단부터 아스팔트 틈새까지 씩씩하게 피어나는 민들레가 좋다. 태생이 소박한 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고 부끄럽지만 작은 만족에서 오는 감사와 평안이 얼마나 큰지는 누려본 사람만 안다. <날마다 만우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그런 이들 같아서, 그런 마음으로 자기의 구멍 안에 농담을 던지는 사람들 같아서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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