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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Apr 14. 2022

엄마의 커피

"이거 너 써. 엄마는 거기 갈 일도 없어."

인스턴트 커피밖에 없는 본가에서 자는 날이면 세수도 안 하고 가까운 카페에 가 커피를 산다. 엄마는 그런 내게 카페 기프트 카드 두 장을 내밀었다. 선물 받았는데 당신은 쓸 일도 없다고. 나는 뒀다가 쓰시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고 홀랑 지갑에 넣었다. 엄마는 어차피 카페에 잘 가지 않으니까, 아메리카노보다 커피 믹스를 좋아하니까. 언제나 제 편한 대로 생각하는 자식이다.

커피 좋아하는 딸을 보고 마침 생각나 건넨 그 쿠폰은 어쩌면 엄마 지갑에 오래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시간 내어 카페에 가는 일, 어지러운 메뉴판을 한참 보다가 커피를 주문하는 일은 엄마에게 막연하고 생소한 일일 테니 말이다.

 

커피 전문점 기프트 카드는 부담 없이 주고받기에 딱 좋은 선물이지만, 엄마에게는 아니다. 비대면, 간편한, 빠른, 스마트한… 이런 단어들 앞에서 여러 번 진땀을 뺄 엄마의 사정을 짐작해 본다. 종종 키오스크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에 관한 기사를 본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겹치며 잠깐 울적해진다. 나 또한 앞사람 주문이 오래 걸리면 은근히 곁눈으로 들여다보면서도 그런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 돌릴 틈 없이 바쁜 시절을 보낸 당신. 한 숨 돌리고 나니 모든 게 간편하고 쉬운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은 무엇 하나 시도하기 어렵다. 인터넷 주문부터 은행일, 휴대전화 사용법까지… 바쁜 아이들 귀찮게 할까 봐 조심스레 전화하고 가끔은 두 번 세 번 더 묻고 싶은 것도 알았다며 대충 얼버무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엄마가 카페에서 기프트 카드를 내밀며 주문한다면 레귤러 사이즈며 톨 사이즈며 도통 알아듣지 못 할 말을 하는 직원 앞에서 적잖이 당황하고 말 것이다.

 

엄마가 준 기프트 카드로 고소한 카페라테를 한 잔 주문해 테이블에 앉았다. 누구한테 받았는지, 왜 받았는지 한 번쯤 물어볼 법도 한데 당연한 듯 지갑에 쓱 넣었던 나는 커피를 앞에 두고 나서야 그게 궁금하다. 아이의 반 친구 이름을 줄줄 외우면서 엄마에겐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식이다.

 




"엄마, 혈관에 제일 안 좋은 게 커피 믹스래."

엄마는 출근하면 가장 먼저 동료들과 커피 믹스를 마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별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한평생 엄마의 노동으로 먹고 자라 다행히도 155센티인 엄마보다 3센티는 더 큰 어른이 되었다. 그런 나는 이제 와서 이런 하찮은 잔소리 따위로 자식 역할을 퉁치려 한다. 평소에 좋은 음식이랄지 약이랄지 엄마의 건강을 꼼꼼히 챙기는 딸도 아니면서.

 

"몰라, 믹스가 힘내야 할 땐 최고야. 정신도 번쩍 들고."

음미라기보다는 복용에 가까운 그 커피를 생각한다. 엄마의 커피는 여유와 낭만이 아니다. 오히려 생존에 가깝다. 기호 식품이 아닌 에너지 드링크다. 혈관이고 뭐고 당장에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어야 하므로 당신에겐 그 황톳빛 음료가 필요하다. 종이컵이 바닥을 드러내면 몇 방울 남은 단물을 탈탈 털어 넣고 아이고 또는 으라차 소리를 내며 일어서겠지. 그리고 바쁜 걸음으로 요양원의 어르신들을 돌보고 약을 가지러 다니고 깔깔깔 웃고 볼멘소리를 하고 고단한 무릎으로 귀가할 테지.

퇴근 후에는 지친 몸을 널브러뜨린 채 화면 가득 ‘수퍼 푸드’, ‘면역력 강화’ 따위의 글자로 가득 채워진 홈쇼핑 채널을 보다가 건강 기능 식품을 주문할지도 모르겠다.

티브이에 나오는 건강식품은 귀를 한껏 팔랑거리며 잘도 결제하면서 매일같이 커피 믹스를 홀짝이는 엄마. 여전히 고된 하루를 보내는 당신에게 어쩌면 영양제보다 더 즉효인,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한 신성한 의식 같은 그 커피를 감히 내가 뭐라고 참견하고 나설까. 매일 마신 엄마의 커피는 노동이 되고 돈이 되고 내 밥이 되고 옷이 되어왔는데.

 

내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사 오면 엄마는 언제나 뜨거운 물을 더 부어 숭늉 마시듯 연하게 마셔서 커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 했다. 얼마 전 그런 엄마에게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산미가 강한 커피를 마셨는데 그 맛이 참 좋았다는 것이다. 맛 표현을 하는 엄마의 표정이 꿈꾸듯이 행복해서 약간 놀랐다. 정말 좋았구나. 그제서야 나는 엄마에게 커피 취향 따위를 알아갈 여유가 없었음을 뒤통수를 얻어 맞듯 얼얼하게 깨달았다. 

 

없는 살림에 겨우겨우 아이들을 키우며 폭풍우를 맞서 걷는 기분으로 살아왔을 엄마. 바쁘고 고단한 일상에 치여 차마 발견하지 못한 당신의 취향은 또 얼마나 무궁무진할까. 그나마 좋아하던 몇 가지, 간 무를 듬뿍 넣은 판 모밀과 향긋한 멍게마저도 매일 남편이 원하는 국을 끓이며 아이들 먹일 나물을 무치며 엄마의 깊은 서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프트 카드로 주문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엄마와 세계 곳곳의 커피를 맛보며 여행하는 상상을 해본다. 우습고 즐거운 상상에 잠깐이나마 마음이 들뜬다.

야속한 세월에 놓쳐버린 당신의 취향 하나하나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다가도, 취향을 만들어갈 여유 없이 살아온 그녀의 팍팍한 삶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 그냥 우리 엄마는 커피 믹스를 좋아한다고, 그냥 그렇다고 치자고 얼버무리는 못난 마음이 번갈아 가며 요동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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