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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Apr 28. 2022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어

내가 뭘 잘못했더라...

더우면 덥다 흐리면 흐리다 날씨 탓하며 운동을 미룬 것? 석 달에 한 번 정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연체한 것? 남편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것? 뭐지? 대체 뭐지?


나는 반성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말 안 듣는 꼬맹이들이나 반성 의자에 앉는 줄 안다면 오산이다.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고 냄새만 맡아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그곳, 치과에 성인용 반성 의자가 있다. 앉으면 절로 겸허해지면서 지난날의 과오를 떠올리게 된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된 기분으로.

어릴 땐 엄마에게 붙들려 치과에 끌려왔지만, 이제는 미룰수록 불어나는 치료비가 내 멱살을 끌고 와 반성 의자에 앉힌다.


임플란트 식립 수술을 하는 날이었다. 작년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임플란트지만 한 번 해본다고 쉬워지는 건 아니다. 인생의 모든 일이 그렇듯.

치과에 가는 날은 아침부터 우울했다. 치아에 조금 더 신경 쓰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아니 더 이상 어떻게 더 하라는 말인가' 하는 대상 없는 분노가 뒤섞였다.





나는 이 관리를 잘하는 편이다. 일 년에 두 번은 스케일링하고 식사 후 꼬박꼬박 양치는 물론, 치실도 빼놓지 않는다. 단 것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도 최소 일 년에 한 번은 손 볼 이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반면 남편은 오 년이 넘도록 스케일링을 하지 않았지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데 어떤 불편함도 없다. 그가 치과에 안 간 오 년 동안 나는 신경치료, 충치 치료, 임플란트 등 대여섯 번의 치료를 하고, 어림잡아 이 백만 원 이상의 치료비를 냈다. 도대체 왜! 왜 나만! 나는 온갖 뾰족한 것들과 치익 치익 괴기한 소리를 내는 진료 도구들 옆에 누워 유치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불공평하다.


불공평한 것은 치아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눈이 좋지 않았다. 목욕탕에 가면 엄마를 찾지 못해 모르는 아줌마한테 등을 내밀 정도로. 그런가 하면 오빠는 책을 무척 많이 읽고 컴퓨터도 종일 했지만, 시력은 거의 몽골인 수준이었다. 내가 컴퓨터를 할 때면 저 멀리 방바닥에 누워서도 친구들과의 채팅을 훔쳐보며 킥킥 웃기도 했다. 나는 성인이 되어 시력 교정 수술을 받았으나 출산 후 다시 안경을 쓰게 되었고, 프로그래머가 된 오빠보다 여전히 나쁜 시력을 가지고 있다.




수술 시간이 긴 탓에 두 번째 임플란트를 심으며 별생각을 다했다.

이런 고초를 당하는 내가 안타까웠다가 있는 것들의 안일함에 분노했다가 결국 타고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차분한 결론에 도달했다. 타고난 건치인들을 시샘하여 뭐하겠는가. 부질없는 짓이었다. 부러울 순 있겠지만 그래도 내 이를 너무 미워하지 말자고.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자고 생각했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가 못쓰게 되면 이렇게 새 이를 넣을 수 있고, 눈이 안 좋으면 안경도 쓸 수 있는데 뭘.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어.

전동 드릴 소리로 소란한 가운데 마음은 왠지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것은 체념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홀가분한 인정이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었구나. 힘겹게 뱃살을 가둔 벨트를 풀어, 두어 칸 뒤에 채운 기분이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어금니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수술의 현장감을 애써 밀어내며 그간 수고한 어금니와 새로 만날 어금니에게 마음으로 노래를 보냈다.


“선천적으로 약한 이는 어쩔 수 없어요.”

잦은 내원으로 친해진 간호사는 찌푸린 미소와 함께 유감을 표했다. 그녀가 건네준 처방전과 아이스팩을 들고 건물 밖으로 나오며 왠지 다음 진료는 조금 더 가뿐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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