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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Feb 13. 2023

그런 재미

<다정함은 덤이에요>, 봉부아

어제 모처럼 남편과 둘만의 시간이 났다. 

아이가 겨울 성경학교를 참석해서 오후 다섯시쯤에나 끝났기 때문이다. (주일학교 만세!) 

보통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오지만 이런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에 과감히  외식을  선택했다. 한국인의 입맛, 어린이계의 흥선대원군인 아이와는 먹을 수 없는 스파게티와 크림소스의 뇨끼를 먹으러 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늦겨울의 비. 평소라면 이놈의 성가신 비가 언제까지 오냐고 투덜거렸을 텐데, 남편과 둘이 놀러 나오니 신발이 젖고 으슬으슬 추운 것마저 뜨끈한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것 같았다. 

어둑어둑한 실내, 조용히 흐르는 음악, 테이블마다 켜진 주광색 조명. 우리는 젊은 부부가 하는 아늑하고 조용한 식당에 앉아 두리번거렸다. 저기 저 구석엔 뭔가 어색한 듯 설레는 분위기의 남녀가 앉아 있고, 엄마들끼리 수다를 떠는 테이블도 있었다. 


"저기는 썸 타는 사인가."

"확실히 애인은 아닌 것 같네. 아마도 두 번째 만남 정도?"

우리는 화기애애하면서도 설핏 어색함이 묻어나는 테이블의 남녀를 힐끗거렸다. 


젊은 부부 둘이 운영하는 듯 오픈 주방은 두 사람이 이리저리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또 사족을 달기 시작한다.

"부부가 둘이 하나 봐. 바쁘겠다. 장사도 잘 되는데."

"그러게."

"선남선녀네. 젊은 부부가 보기 좋네. 열심히 사네."

"아줌마같이 왜 이래."

확실히 요즘 청춘들은 보기만 해도 흐뭇한 걸 보니 역시 청춘을 졸업한 지 오래된 걸까.


설렘은 존재하지 않는 우리 테이블은 따끈따끈한 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사람들과 가게에 대한 관심을 거둘 수 있었다. 현지화된 뇨끼네, 파스타에 대패 삼겹은 굳이 넣을 필요 없지 않았나... 요리에 진심인 남편은 보급형 백종원답게 분석에 골몰했으며, 이러나저러나 맛있으면 장땡인 나는 거의 누가 핥은 수준으로 접시를 혼내줬다. 겉바속촉인 뇨끼와 어우러진 진하고도 깊은 크림소스가 끝내줬다. 어두침침한 실내와 은은한 조명, 창밖의 빗방울 속에서 우리는 낙지볶음 집에서 밥 비벼 먹은 사람처럼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가게를 나섰다. 




2차는 카페. 

여전히 비가 오고 역시나 어두컴컴한 신상 카페 3층에 앉아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저음이 울리면서도 부드러운 소리로 느린 음악이 흘러나오고 역시 분위기가 좋다. 아직도 아이를 데려가려면 두 시간 반이나 남았다. 

올해 결혼 십 년 차. 어둡고 조용한 카페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남편과 나의 공통된 지인 이야기, 나의 일, 그리고 남편의 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여러 감정들에 대한 것들까지. 

내 이야기보다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 우리가 키우는 아이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데굴데굴 굴러간다. 이만큼 이이만큼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한 시간 두 시간의 대화는 커져 가고 우리는 깔깔 웃다가 고심하다가 헛소리를 한다. 

익숙함이 설렘을 이긴 지 오래. 맥락 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 서로 모르는 것 빼곤 다 아는 우리의 세월이 새삼스레 좋다. 


찰칵찰칵 통창을 배경으로 젊은 남자는 여자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는 동안 나는 비사이로막가 같은 느낌으로 셔터음을 뚫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비 사이는 차치하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도 쉽게 통과하기 어려운 두께지만...

중대한 일을 마치고 와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오늘 볼 일을 못 보고 나왔어. 아침에 바빠서."

"그럼 계속 참은 거야?"

"참은 건 아닌데 계속 있는 느낌?"

둘이 배를 잡고 웃다가 그만 아이를 데리러 가자며 일어난다. 


로맨틱한 조명과 그럴싸한 음식보다, 설레는 기분과 호기심보다 나는 이런 게 좋다. 나만 좋은 거 아니지 남편.


같이 산 지 이십 년이 되었다. 시장 좌판의 천 원짜리 밥그릇으로 시작한 살림이었지만 다이소 그릇을 사고, 이마트 그릇을 사고, 깨지지 않는 아름다움인 코렐로 업그레이드하는 재미가 있었다. 사랑의 열정 같은 건 이제 모르겠지만 같이 사는 재미가 있다. _ <다정함은 덤이에요>, 봉부아 


십 년간 우리 안에 머물다 간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그릇에 저런 그릇에 담긴다. 다이소일 때도 있고 형편이 조금 나아져 이마트 그릇일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푹 익고 맛이 들었으니 그것으로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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