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권태기에는 초음파 사진이 특효

아이를 만나기 전의 설렘을 기억하기

by 잠전문가

길고 긴 겨울이다.

늦가을에 온 이사로 3월 어린이집 입소까지 아이는 길고 긴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스갯소리로 "선생님 미치기 전에 방학하고, 엄마 미치기 전에 개학한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미 미쳐서 정신줄을 놓아버린 지 오래다.


삼시 세 끼, 간식 두끼에 각종 만들기, 블록, 이불로 둘둘 싸 인간 김밥 만들기, 침대에서 광란의 동요 댄스타임, 인간 미끄럼틀, 언니 놀이, 여보 놀이, 요리사 놀이 등을 하다 보면 이게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지고 마는 것이다. 이 생활도 벌써 삼 개월 차에 접어드니 육아 권태로 정신적 위기가 요즘 잦다. 아이는 늘 아이다운 행동을 할 뿐이지만 그마저도 육아 권태 렌즈에 포착되면 확 그냥 막 그냥 인 것이다.


오늘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웬일인지 화장실만 가도 "엄마!!!!" 하며 따라와 문 앞에서 죽치는 내 죽순이(?) 딸내미가 조용하다. 안방에서 뭘 하나, 또 거울 보고 자기 심취의 시간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서랍 속에서 산모수첩을 꺼내 보고 있다.


아기 인형까지 앞에 앉혀다 놓고 열심히 초음파 사진을 보고 있는 5세 아동


아이는 나에게 주수마다 초음파 사진이 붙어 있는 산모수첩을 들고 와 물었다.

"엄마 이 콩 같은 게 나야?"

응, 그렇지. 이 콩이 너였지. 웃음이 난다.

아이가 생각보다 더 신기해하길래 내친김에 초음파 동영상도 보여주었다. 아이는 뱃속 본인의 자세를 따라 하며 웃고 난리가 났다. 나는 즐거워하는 아이 옆에서 새삼 추억에 젖는다.


임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봤던 아침, 병원에서 임신 확정을 받고 남편에게 전화하던 길, 생각보다 또렷하고 강렬했던 태아의 심장소리, 4센티도 안 되는 몸에 팔다리가 생겨 젤리 곰같이 귀여웠던 초음파 사진, 아이를 막 낳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아이가 생각보다 너무 못생겨서 충격(?) 받았던 새벽...


빈티지 브라운 필터를 덧입힌 것처럼 몽글몽글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면들이다. 아이를 만나기까지 굉장한 설렘 속에 지냈었는데, 어느덧 아이는 나에게 당연하고 익숙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지나 보면 어느 것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 감사하고 무탈한 날들이 부지런히 쌓이며 오늘의 아이를 키워내고 있었다. 마치 아이는 그것을 아는 것처럼 내게 초음파 사진을 들이밀고 있었다. 나를 만났던 설렘을 잊지 말라고. 우리의 이 놀라운 인연에 벌써 심드렁해지면 어쩌냐고.


5센티 남짓이었던 작은 태아가 내 앞에서 이렇게 까불고 있다니!


초음파 사진으로 시작된 놀이는 엄마의 과학 수업 '임신과 출산, 생명의 신비 속으로 고고!'부터 산모수첩에 그려진 산모 자세 따라 하기(이걸 왜...), 인형을 배에 넣고 산모 체험(대체 왜...), 산모님 여기 머리 보이시죠, 꼬리(아이는 남자의 성기를 꼬리라고 부른다.)가 있는 걸 보니 아들인 것 같네요 다음 주에 아이가 나올 것 같아요 어쩌고 저쩌고 산부인과 놀이(언제까지 할 건데...) 백오십 번 반복으로 이어져 나를 지치게 했지만 이만큼 건강하고 멋지게 자라준 아이가 어찌나 대견하고 고마운지 육아 권태가 한 방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아이와 함께 들어본 쿵쿵 거리는 태아의 심장소리는 권태로운 마음을 쿵쿵 울렸다. 아이의 존재만으로 받은 것이 너무 많은 삶인데 이렇게 자주 잊고 산다. 종종 엄마놀이가 지겹고 모든 게 심드렁해질 때면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봐야겠다. 당연한 오늘은 없으니 모든 지난날에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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