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가 사그라든 부드러운 햇빛도, 선선한 공기도 딱 좋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상쾌한 초여름의 주말 저녁을 그냥 보내는 것은 다가올 월요일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 우리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산책에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뛰지 마! 계단에선 장난치지 마!! 제발 조심해!!! 앞에 봐야지!!!! 랩을 하며 우당탕탕 내려오는데 아파트 동 입구에 한 어르신이 신문지를 깔고 앉아 마늘을 까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니 우리 아랫집에 사신단다. 몹시 당황한 나는 우리 집 아기공룡을 대신해 층간소음에 대해 거듭 사과드리며 최대한 밝고 착해 보이게 웃었다. 당신도 손주들이 있어 이해한다는 말씀에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아이는 가지고 나온 분필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눈치 없는 공룡아, 제발..!
"딸이 집에서 마늘 까면 냄새난다고 지랄 지랄을 해요.
그래서 여기 앉아 모기 뜯기면서 까고 있는 거예요."
어르신은 마늘과 함께 딸을 까는 것으로 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셨다는 것, 딸이 셋이라 곱게 키우고 싶어 사투리도 못쓰게 하고 동네 문화원에서 표준어를 배우게 했다는 것, 그래서 그런지 어디 가서 발표를 해도 특별하다 다르다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는 것, 딸들은 교계와 금융계에 몸담고 아들은 자영업을 한다는 것, 시집간 딸 하나는 시댁에서 사 준 시내의 40 평대 아파트에서 살며 그 집 손주들이 오면 할머니 집 좁다고 집 앞 학교로 놀러 나간다는 것, 유치원 교사인 딸은 초등학교 병설(몹시 강조) 유치원에 다닌다는 것...
예전엔 무슨 말을 하든 자식 자랑으로 이어지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뻔하고 지겹게 느껴졌었다. 제법 순진하게 웃고 맞장구를 잘 친다 싶으면 그때부터 구구절절 이어지는 박혁거세 신화 같은 자식 자랑은 거북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특히 택시 같은 밀폐된 장소에서 피할 수도 없이 듣게 되는 경우에는 애꿎은 이어폰만 만지작거리며 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도 엄마가 되서일까. 조금은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지금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일까.
끝없는 자식 자랑이 미워보이기는커녕 상기된 표정으로 마늘을 까는 어르신의 얼굴이 꽤나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마늘 냄새에 지랄 지랄 하는 딸에 대해 이토록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는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어디서 우리 엄마도 죄 없는 누군가를 붙잡고 딸은 뭘 잘하고, 사위는 이번에 이직해 제주도로 이사를 갔으며, 손녀는 벌써 자기 이름을 쓸 줄 안다고 누가 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을 대대적으로 뽐내며 달뜬 표정을 하고 있을까.
내 딸이 얼마나 데일리 하게 똥을 잘 싸는지, 얼마나 웃긴 말을 잘 하는지, 얼마나 유연하게 다리를 찢는지 그 누구에게도 자랑할 순 없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뿌듯해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일까.
대화를 나눈 지 10 분도 되지 않아 203호 일가의 호구조사가 끝이 났다. 마침 그림 그리기가 지겨워진 꼬맹이의 재촉을 내심 반가워하며 인사를 드리고 산책에 나섰다.
신문지를 깔고 앉아 마늘을 까던, 모기에 앙앙 물리면서도 입에 침이 마르게 자식 자랑을 하시던 어르신.
어쩌면 행복은 그런 것 아닐까.
작은 것 하나라도 내 가족이 자랑스럽고 떠올릴 때마다 어깨를 으쓱하게 되는 것. 서로의 자랑이 되는 것.
모처럼 즐거움 가득한 얼굴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