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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Jul 30. 2019

안 되는 만 가지 이유 말고

육수가 흐르는 계절의 멘탈 중간 점검

오래전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각에 비하인드는 없어요."

라디오 DJ였나, 아나운서였나... 아무튼 촌각을 다투는 환경에서 일하는 방송인들이 게스트로 나왔는데 지각 에피소드를 듣던 와중에 김구라가 예의 떨떠름한 표정과 함께 했던 말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뉘앙스였던 것 같다. 


자기 합리화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의지박약의 아이콘인 내게 꽤나 자극이 되는 말 같아 휴대폰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물론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지각한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로, 살면서 지각을 몇 번 해본 적 없지만 이 말은 왠지 지각 말고도 여러 면에서 생각해볼 만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가족과의 관계, 도전해보고 싶은 일, 건강 같은 것들 말이다. 

부모님께 드릴 수 있는 것, 해드리고 싶은 말,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 남편에게 보낼 수 있는 격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 건강 관리... 부지런히 하지 않다가 속수무책의 상태가 되면 왠지 어디선가 김구라가 나타나 내 앞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예의 시금털털한 표정을 지을 것만 같다. 


비하인드 스토리 없는 일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인생은 때로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지난 시간의 무게를 잰다. 그 앞에 선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어떤 일을 미루어 망치고 후회가 몰려올 때 시시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읊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사랑과 일, 건강도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한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됐든 지난날을 아쉬워하진 않겠지. 스스로에게 좀 더 명료한 사람이 되고 싶다. 




"비 오면 비 와서 안 가고, 더우면 더워서 안 가고 그렇지 뭐. 허허"

수영 강습에 어느 할머니가 자주 안 나오셔서 강사님이 여쭤봤더니 남편 되시는 할아버지가 귀엽게 부인 흉을 보신다. 강사님은 "이유야 만 가지도 넘죠!" 하며 함께 웃는다. 


아.. 예...


만 가지라... 이유야 만들자면 정말 만 가지가 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연초에 헬스장을 가고 연말에 한껏 차오른 배를 두드렸는가! 인류의 유구한 자기 합리화 역사는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시간이 없다." "체력이 없다." "인내심이 없다." "트라우마가 있다." "타고난 게 그렇다." 등등...

말하자면 끝이 없고, 안 되는 이유는 수만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온몸으로 육수를 뿜어내는 이 계절, 나흥키 CF에나 나올법한 김연아 님의 멘트를 떠올려보자.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치열하게 살고 있지도 않으면서 감히 김연아 님의 말을 빌려오려니 부끄럽지만, 이 더위에 정신 차리고 세워놓은 계획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괜스레 읊어본다. 

안 되는 만 가지 이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냥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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