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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Jul 26. 2019

평화로운 수영장에서 홀로 재난 영화 찍은 날

왕초보 수영 일기 _ 네에? 킥판 없이 자유형이욧?!

수영 배운 지 11일째.
초보 강습반에는 초보 치고 꽤나 잘하는 사람, 적당히는 하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물론 나는 맨 마지막에 속한다.
앞사람들이 사이드킥을 하니 팔꿈치를 어떻게 꺾니 해도 어차피 우린 아직 킥판 잡고 발동동 단계이기 때문에 ‘아 그렇구나’ 하고 영혼 없이 구경하곤 하는데 아 글쎄 순진무구팀 차례가 돌아오자 선생님이 킥판을 걷어가는 것 아닌가!
“이제 킥판없이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번 해보세요.”

킥판을 빼앗기자 ‘아무것도 몰라요~’ 왕초보 특유의 순진한 미소는 이내 나라 잃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평화로운 수영장에서 나 홀로 재난 영화 찍는 중...



내 차례가 되었다. 떨리는 가슴으로 두 손을 올리고 물 위에 누웠다. 발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킥판 잡고 느긋하게 돌릴 수 있었던 팔은 일정한 박자를 잃고 근본 없이 허우적거렸고, 숨을 쉬려고 고개를 들어도 자꾸만 내 코와 입은 물속에 있었다.
급류에 휩쓸려가는 줄 알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수심 130cm수영장에서 나는 홀로 재난영화를 찍었다.

턴을 해서 도전, 또다시 도전.
아직 자세도 엉망진창에 한 오 미터 가면 멈춰 서서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토한다. 락스 물 많이 먹고 요즘 체내 소독이 아주 잘 되겠다는 남편 말을 웃어넘길 수 없다. 수영장 물 하루에 세 컵씩 먹고 가는 여자 나야 나...
그래도 가만히 물 위에 누워 떠있지도 못했던 내가 몇 미터라도 물속을 헤엄쳐갈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짜릿하게 재미있다. 물론 직접 수영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머리를 쥐 뜯고 싶겠지만!

나야 아직 젊지만 어르신들 열심히 자세 연구하고 될 때까지 해보시는 근성에 늘 도전을 받는다. 처음 수영 배운 날 ‘좀 더 어릴 때 배울걸.!’ 했는데... 아직 늦지 않았다. 아니, 몸져누워있지 않는 한 늦은 때는 없다. 지금 더 쓸만한 관절일 때 열심히 돌리자. 에헤라디야!
물개 중년이 되기를 소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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