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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Aug 01. 2019

한 여름의 서귀포, 生의 축제

"습기 때문에 서귀포를 떠나는 사람도 있다 하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녀석일지 궁금하다. 잠깐만 한눈팔면 탐스럽고 부지런한 곰팡이 꽃이 피신단다. 8월 말쯤이면 이곳 탐라 생활 일기에 "졌다.." 또는 "그까짓 습기" 이 둘 중 하나로 표현할 수 있겠지. 대체로 인내가 부족해 겨울에 춥다 춥다 여름에 덥다 덥다를 입에 달고 사는 내게 습기라고 버티기 쉽겠냐만은."


지난 6월에 썼던 서귀포 생활 일지의 한 부분이다. 

8월 말까지 지내볼 것도 없이 서귀포 습기의 위세는 대단했다. 한창 시무룩한 날씨라고 적어둔 적이 있는데 그 시무룩이 글쎄 한 달 조금 넘도록 이어졌던 것 같다. 


보조석에 탔는데도 심장을 부여잡으며 갔다. 


지난 한 열흘 정도는 정말 가시거리 200m도 안될 정도로 물안개가 가득했다. 멀리 사는 친구들에게 사진을 찍어 '내가 지금 물속인지 꿈속인지 모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제주에 오래 산 사람들도 이번 장마는 유난히 긴 것 같다고들 했다. 봄, 고사리 장마철에 비가 안 오면 여름에 이리 습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4월쯤 비가 많이 내리고 나면 고사리가 쑥쑥 자라나 제주도에선 이맘때의 긴 비를 고사리 장마라고 부른다.)


드디어 며칠 전부터 작열하는 태양이 등장했다. 얼굴에 기미가 올라오든, 팔다리가 시커메지든 상관없다. 습기가 가시고 무지하게 더워졌지만 그마저도 환영, 또 환영이다. 습하고 어두운 날이 이어지니 의욕이란 의욕은 다 사라지고 막 우울해지기까지 하던 터다. 해가 그리웠던 사람들은 드라이브를 간다, 바다를 간다 엉덩이에 불붙은 양 난리가 났다. 


수묵화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이 채도 빵빵한 풍경을 마주하자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아이와 걸으며 귤이 얼마나 자랐나 확인하는 아침 일상


여름은 어디서나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지만 서귀포의 여름은 더더욱 그렇다. 

집 앞에 온통 귤밭, 온갖 종류의 나무들, 이름 모를 풀들이 있으니 덥고 습한 여름엔 하루 이틀 새에 몰라보게 무성해진다. 보행로 옆 정리된 풀들은 돌아서면 수북이 자라, 몸을 옆으로 돌리고 발 디딜 곳을 확인하며 조심스레 걷게 된다. 

파란 하늘과 쨍쨍한 햇볕, 우거진 나무들과 옥빛 바다는 아름답지만 '자연 그대로'의 압도적인 생명력이 때로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지렁이는 무슨 새끼 뱀만큼 크고 실하며, 가끔 길가다 엄지손톱만 한 벌레들을 마주할 때면 심장이 자이로드롭급으로 수직 낙하한다. 그리고 심지어 작은 뱀이나 쥐의 사체를 길 중간에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마주하기도 한다.(쓰면서도 괴롭다...) 따지고 보면 이마저도 내가 자연을 벗 삼은 곳에 살고 있다는 증거겠지.


우리 집은 아파트이기도 하고 자주 방역과 조경관리가 되는 편이긴 하지만, 도민 커뮤니티에 보면 집에서 지네에 물렸다거나 마당에 뱀이 다닌다 등의 글들이 많다. 온갖 벌레와 잡초를 손 봐야 하지만 정원을 홀로 누리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단독주택의 낭만과 현실과 이랄까, 그런 종류의 딜레마가 제주 생활에도 존재하는 것 같다. 낮은 집들 위로 크게 펼쳐진 하늘, 한가로운 귤밭과 키 큰 나무들, 목이 아프도록 별 보고 걷는 밤 산책... vs 뱀, 지독한 모기 놈들과 온갖 다양한 이미지로 현현하시는 곤충들... 어찌 됐든 덥고 푸르고 왕성한 생명력에 압도되는 서귀포의 여름이다. 


아이는 카페에서 아이스홍시가 올려진 홍시 빙수를 먹고 오더니 얼른 가을이 와서 감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른다. 더워서 너무 힘들다고 오 분을 못 걷는 아이를 달래며, 뙤약볕에 감도 귤도 잘 익어야 가을에 먹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줘도 힝힝거리고 소용이 없다. 참나, 고 입에 달콤하고 말캉한 것들이 들어갈 때면 땡볕에 열심히 서 있었던 감나무며 귤나무는 생각도 안 나겠지. 맹렬한 여름 햇빛처럼 아이도 나무도 거침없이 자라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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