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로의 이사를 앞두고 그동안의 생활을 바삐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던 도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부모님과 친구들, 익숙한 장소들과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이사 전 날, 다니던 치과에서 검진과 간단한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세찬 가을비가 내리는 버스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내 마음은 아쉬움과 막막함, 이른 그리움 따위의 감정들로 일렁이고 있었다.
딩동! 아빠의 메시지였다.
“너희 집 근처에 와 있으니 도착하면 연락해라.”
메시지함을 열자마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미리 연락도 안 하고…’
치과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한 시간이 족히 걸렸고 애매한 점심시간, 세찬 빗줄기, 아빠에게 익숙지 않을 우리 동네… 온갖 것들로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마음은 정체 모를 짜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해 동네 전집에서 막걸리를 드셨다는 아빠를 모시고 집에 들어갔다. 아이도 남편도 없는 집에서 아빠와 마주 앉아있는 것은 불편하고 어색했다. 애매한 오후 세 시에 다정한 아버지도, 다정한 딸도 아닌 둘은 애매하게 겉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삿짐이 먼저 떠나면 우리도 비행기를 타고 출발한다거나 아이 어린이집은 가서 좀 기다려야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아빠는 갑자기 울음 섞인 목소리가 되었다. 정확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들려오는 소리보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감정이 나를 압도했다. 결혼할 때 아빠가 써준 편지를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해외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당일로도 언제든 갈 수 있는 제주도였지만 마음은 그렇게 명료하게 설득되지 않았다. 곧 더 먼 곳으로 떠나는 딸을 보려고 연락도 미처 못하고 부랴부랴 찾아왔을, 세찬 빗 속에서 마른 몸을 동그랗게 숙이고 걸었을, 딸이 살았던 동네에서 마침내 막걸리 한 잔 할 가게를 찾아 앉았을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욱하는 성격과 익숙한 술 냄새, 가난하던 어린 날의 기억으로 많은 순간 아빠를 미워하며 살아왔는데 어느덧 미움은 연민과 아쉬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간은 너무 빨라 야속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거칠고 아픈 것, 감당이 안되던 것들을 순하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나보다.
“좋은 꿈 꾸고 너무 걱정하지 마. 제2의 인생을 제주도에서 행복으로 시작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날 저녁, 웃는 표정의 이모티콘과 함께 보내온 아빠의 문자에는 애써 씩씩한 척하는 목소리가 묻어났다.
또다시 가을이 왔다.
제주에 온 지 이제 곧 일 년이다. 이사 전 날의 아빠 모습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하는데 그때마다 명치를 맞은 듯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파온다. 제주에 산 햇수를 세어볼 가을마다 찾아올 뻐근함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