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친구들. 비, 습기, 태풍...
예... 또 온다고 합니다.
2 주전에 아이와 베란다에서 구운 떡을 먹으며 태풍의 현장을 구경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바람에 미친 듯이 나부끼다 두꺼운 가지마저 맥없이 꺾여버린 나무들과 알라딘의 양탄자처럼 날아다니는 천막들에 "오오오..!" "허어어얼" "컥!!" 따위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이틀간 강제 감금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온다고 합니다. 이름은 미탁... 공식적으로는 2일 저녁에서 3일 새벽쯤 이곳 서귀포에 근접한다고 하는데 이미 비는 시작되었고 바람소리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지난 태풍 링링과 타파가 왔을 때도 근접할 때가 돼서야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이번엔 벌써부터 나무들의 머리채를 흔들어재끼고 있습니다. 만백성에게 고하노니~를 외치는 우렁찬 서문탁 언니의 목소리처럼 태풍 미탁이는 만천하에 바람의 위력을 얼마나 고하려는 걸까요...
제주 살이 1년 차. 제주에서 처음 지내본 여름은 덥기보다 무지막지하게 습했습니다. 가시거리가 200m 채 안될 때도 있었고 여기가 물속인지 꿈속인지 구분이 가지 않던 날들도 많았습니다. 비도 시원치 않게 내려서 마치 큰 일을 본 건지 만 건지 하게 보는 것처럼 (비유 참..) 찝찝하고 꿉꿉한 날들이었지요.
제주도는 신기하게도 동네마다 날씨도 많이 달라서 어디는 억수같이 비가 오는데 어디는 쨍하다거나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지역 커뮤니티에 서쪽 날씨 어떤가요? 동쪽 날씨 어떤가요? 난리가 납니다. 비를 피해 어디라도 가보려는 사람들의 날씨 체크가 이어지지요. 외지에서 여행을 오셨다면, 그런데 비가 내린다면 다른 지역은 날씨가 어떤지 체크해보고 그쪽으로 행선지를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습기와 습기와 또 습기와 비와 가끔 쨍한 해가 들던 여름이 가고 드디어 하늘이 높아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아! 그죠잉. 제주는 가을입니다. 가을은 제주입니다. 파란 하늘이 낮은 지붕들 위로 펼쳐지고 상쾌한 바람이 부는, 억새가 은빛 물결을 이루는 제주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저의 첫 제주여행도 가을이었는데 그 기억에 제주를 사랑하게 되었고, 제주에 살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 며칠 날씨가 무지 좋아서 콧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가을 되면 소풍 갈 곳 리스트 뽑아놓고 그랬는데... 자꾸만 옵니다. 링링, 타파, 미탁... 아니, 지들이 무슨 쓰레기 배출일도 아니고 이렇게 정기적으로 성실하게 찾아올 일이랍니까.
이번 태풍은 올해 들어 7 번째로, 이렇게 많은 태풍이 한국에 온 건 60년 만이랍니다. 으하하. 작년 늦가을에 이사 와서 이제 곧 제주도민 일 년차가 되어가는 저로서는 몹시 당황스럽습니다. 일 주년 기념행사인가...
내일 제주도의 대부분의 학교들은 조기 하교 명령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내일 저도 아이 어린이집은 안 보낼 생각입니다. 위험한 날씨에 안전히 쉴 수 있는 집이 있어 감사하지만 하루가 천년 같을, 종이접기 수억 번과 앞구르기 백만 번, 인형놀이 일흔아홉 번으로 채워질 내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당이 떨어지네요.
그보다 아이와 다니며 매일 보던 귤밭의 귤들이 무사할까, 맛없어 지진 않을까 걱정도 되고 내일 태풍 길에 퇴근할 남편의 안위로 심란한 밤입니다. 집에 있어서 태풍의 위력을 잘 몰랐는데 지난 번 태풍이 지난 후 버스를 타고 가다 길에 쓰러져 있는 나무와 기둥, 내팽개쳐있는 간판들을 보며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를 재워놓고 후다닥 마트에 가서 태풍 대비 집콕에 필요한 비상식량을 쟁여왔습니다. 모쪼록 농부의 마음 아프지 않게, 큰 사고 없이 조용히 지나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만 오너라. 이것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