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우리 집 지붕은 초록색이었다. 마치 빨강머리 앤의 초록색 지붕집 마냥 비록 2층 집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랬다. 초록색 지붕집.
초등입학 전 우리 가족은 조금 더 뒷걸음질 치는 마음으로 쪼그라들듯 이사를 했다. 그 집주인은 권 씨였던 걸로 기억된다. 그냥 권 씨 아저씨였다. 동네할아버지뻘로 아빠와 오가며 인사도 나누시며 그럭저럭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지내셨던 이웃사촌.
우리는 그 집 한 칸을 빌어 이사했다. 어린 맘 이래도 눈치는 있었나 보다. 가세가 기울었기에 초록색 지붕집을 팔고 단칸방을 빌어 한방에서 옹기종기 잠들기를 적응해야 했다.
엄마는 그 당시 숙식이 제공되는 식당으로 일나 가셨고 할머니와 아빠, 오 남매 중 큰오빠는 서울로 기숙사가 제공되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한방에 6명이 잠들기란 쉽지 않은 현실. 가끔 아빠는 권 씨 아저씨의 다른 방한칸에서 주무시곤 하셨다. 좁디좁은 그때의 생활은 초등입학 전인 나에게도 유달리 불편했던 모양이다. 권 씨 아저씨집에 앵두나무가 있었더라면 그리 불편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초록색 지붕에 두고 온 자두나무, 앵두나무가 무척이나 아쉬웠다.
시간은 어느덧 앵두가 빨갛게 익혀주는 계절을 만나게 해 주고 초록색지붕집 뒤를 지나는 길엔 늘 시선이 앵두나무에 머물곤 했다. 새로 이사 온 초록색 지붕집주인은 진돗개를 키웠다. 살금살금 앵두나무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진돗개는 짖어댄다. 앵두나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가깝고도 멀게 느껴지는 거리다.
'그 앵두는 내 건데...' 하며 매번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못 먹는 것에 대한 애타는 마음일까? 초록색 지붕집에서 짧게 살다 이사 간 마음만큼 미련이 한아름이었으니... 앵두가 야속한 내 마음을 알려나?
내 속도 몰라주게 빨갛게도 잘도 익던 앵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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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산책하다 골목길에서 앵두나무를 보았다. 주택집이라 가능한 앵두나무에 시선이 머물러 한참을 서성였다. 그 시절처럼 먹고 싶다란 생각보단 그땐 그리 내 속을 태우던 앵두가 내 앞에 인사라도 하는 듯했다. 빨갛게도 맛있게도 익어간 앵두처럼 나 또한 나이 듦이 아닌 익어가는 중이라고 앵두에게 말을 건넸다. '너도 익느냐 애썼다. 난 좀 더 익어가볼게. 아직은 서툰 거 투성이라 삶이 붉게 익기전이야. 먼 훗날 흐뭇하게 먹을 수 있도록 붉은 마음으로 살아볼게' 뜬금없이 앵두에게 내 마음을 전해보고 그 시절 나도 소환해 보았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 과일가게에 놓인 앵두가 눈에 들어왔다. 한팩 들었다. 그리곤 슬며시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아이들에겐 어떤 앵두가 될지 모르지만 엄마인 나에겐 속 탔던 붉은 앵두였다는 것을... 맛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음에 감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