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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고 향기롭게 Feb 07. 2022

뭔가 허전하다. 허전해...

뒤늦게 알아버린 노란 그것!

얼마 전 동네 마트 냉장고 코너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오늘은 뭘 해먹이지?' 도돌이표 같은 끼니의 걱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무한히 반복되고 있는 일상 속에 시선이 머문 게 있었으니 그건 노랗고 기다란 사각 모형을 한 단무지였다. 그것도 김밥용 단무지...


김밥용 단무지를 잡는 순간 다른 재료들의 선택을 어렵지 않게 집어 올린다. 김밥으로 결정한 순간이었으니, 김밥에 딸린 식재료들이 장바구니를 금방 채운다. 냉동실엔 친정엄마가 주신 김밥용 김 100장이 있다. 적어도 난 100개의 김밥을 해 먹을 수 있다. 김밥용 김만 있는 것으로 든든한 순간들이다.


막상 김밥을 해 먹기로 단무지를 비롯한 재료들을 구비해 왔건만, 다른 메뉴들로 도무지 밥상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김밥의 꼬들함에 씹기가 힘들다며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잘 먹어주면 100개 금방 만들어 없애 버릴 수 있는 나의 의욕충만인데 말이다. 첫째는 엄마의 김밥은 좋지만 그 뒤가 싫다고 한다. 김밥하고 남은 재료들을 잘게 썰어 볶음밥으로 탄생시켰던 나의 음식 패턴을 고스란히 들켜버리고 말았다. 싫어도 다 먹어야 하는 식재료가 아까워 그랬는데, 패턴에 변화가 필요한 거 같다. 그나마 둘째는 나의 김밥을 좋아한다. 누구 하나 잘 먹어주는 식구가 있는 게 어딘가! 주말이 되자 김밥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시금치를 데치고, 참기름, 소금 간하여 한편에 두고 당근도 길게 채 썰어 소금 솔솔 뿌려 프라이팬에 볶아주고, 맛살도 프라이팬 살짝 구워내고, 계란은 3개를 풀어 지단을 만들어 놓았다. 명절을 보낸 지 며칠 지나지 않은지라 선물로 들어온 스팸은 김밥용 햄을 대신했다. 어묵도 길게 썰어 간장과 물엿으로 살짝 볶아 두고 이젠 김밥을 말기만 하면 된다. 옵션으로 멸치를 고추장에 볶았다가 물엿과 참기름으로 마무리해 두었다. 이렇게 볶아둔 멸치를 보고 첫째는 불개미 같다고 씩 웃으며 지나간다. 불개미라... 생각지도 못하게 훅 들어온 한마디에 째림으로 응답해 주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상하다.. 친정엄마의 김밥은 늘 7개였는데... 여기서 뭐가 빠진 것인지? 불개미 같은 멸치까지 합치니 7가지가 된다. 나의 무심함은 여기서 극에 달해주었다. 6개면 어떠리 돌돌 말아둔 김밥이 12줄이 되었고, 그중 하나를 썰어 한입 먹었으때까지 몰랐다. 다시 한입 먹는 순간 번쩍하며 스치는 생각에 12줄 김밥을 보며 안절부절못했으니...

마트에서 김밥 만들기로 결정하게 해 준 식재료. 김밥은 단무지 맛이라는 우스개 소리로 했던 그 달짝하면서도 짭조름하고 아삭한 식감의 노란 자태를 힘껏 뽐내야 하는 그게 없었다. 이 12줄 김밥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단무지가 빠져버린 김밥을 힘이 빠진 채 썰었다. 김밥을 썰고 접시에 담아두니 노란 단무지의 빈자리가 왜 이리 크게 보이는지 말이다. 다행히 불개미 같은 멸치가 들어가 간은 맞았지만 단무지가 빠졌다 생각하는 순간 단무지의 빈자리는 너무 크게 느껴졌다. 사실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은 모르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김밥 말기에 의욕이 활활 타올랐던 나를 생각하면 속상함은 빠진 단무지 빈자리만큼 크다.


단무지는 따로 먹기로 하고, 올해 처음 만든 김밥은 그래도 맛있다는 아이들의 칭찬 속에 두 끼 만에 사라져 버렸다. 아직 냉장고 안에는 김밥용 단무지가 덩그러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저 단무지를 쓰려면 조만간 김밥을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그때는 너를 일 순위로 깔고 시작하겠노라고 그동안 유통기한 넘기기 않게 잘 지내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다음엔 어떤 김밥을 만들어 먹어볼까? 김밥을 좋아하는 둘째에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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