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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고 향기롭게 Feb 23. 2022

오래된 일기장

30여 년 전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졸업식 하던 날.

6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된 친구와 친하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는 내게 학교 앞 문방구에서 간식을 고르라며 200원어치를 고르라고 한다. 10원 20원도 가치가 발휘하던 그 시절 200원어치 고르라는 건 내겐 신세계였다.

 

그때 빵 코너에서 휘둥그레 고르던 맛 참.

카레 맛난 식빵 테두리 주전부리는 스낵과 빵과과 러스크 중간 어디쯤 있는 나에게 주는 상과도 같은 간식이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선한 거 보면 자극이 제대로 되었던 모양이다. 친구가 200원어치 고르란 말에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100원은 맛 참을 샀는데 나머지 100원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기억 저편.


한해 같은 반이 되면서 급속도로 친해진 친구와 자주 시간을 보냈다.  한 번은 하굣길에 쓰레기도 같이 주우며 친구네 집까지 갔었었다. 그 친구네 집을 처음 가던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언덕길 맨 꼭대기에 위치한 집은 하얀 철대문이 반쯤 열려있었고, 정원엔 정원수들이 아기자기하게 깎여있었다. 마침 정원사 분께서 예쁘게 손질하고 계셨었다. 또 다른 한편엔 호수로 물을 뿌려 잔디에 물을 주시던 분이 계셨었다. 


우리 집과 너무 다른 환경 속에 인사를 하고 친구 방으로 들어가 놀던 중 친구는 쟁반에 야구공만 한 노란 과일을 몇 개 들고 들어왔다. 귤도 아니고, 딱딱한 껍질을 도저히 깔 수가 없어 벽에 던졌다. 그럼 조금 흐물거려 깔 수 있을까 싶어 그랬던 것이다. 몇 번이고 벽에 던지다 못해 친구는 들고 다시 부엌으로 갔다. 친구 따라 쪼르르르 들어간 부엌에선 한 아주머니께서 웃으시며 껍질을 칼로 벗겨 주셨다. 그랬다. 그건 귤이 아닌 13년 인생에 처음 보는 오렌지였다. 귤보다 커다란 알맹이를 자랑하던 오렌지와의 첫 만남이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드리운다. 오렌지. 오렌지. 이걸 오렌지라고 하는구나... 맛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오렌지를 볼 때면 문득 그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기도 하는 요즘이다.


그런 친구와 4계절을 보낸 후 국민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내게 선물을 내민다. 파랗고 하얀 싱그러울 거 같은 바탕에 여자 소녀랄까? 긴 머리에 가녀린 청순함이 느껴지는 그림부터 맘에 들었다. 그렇다. 일기장이었다. 중학교 가서도 가끔 일기를 쓰며 속상하거나 기쁘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써보라고 그 친구는 엄마와 선물을 같이 골라 샀다며 내게 전해주었다. 그 당시 난 그 친구에게 어떤 선물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난다. 받은 것만 기억하는 나의 이기적 기억 속에 일기장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국민학교 시절 일기는 매일 써야 했다. 비가 왔는지, 눈이 왔는지 해가 떴는지 일기가 밀릴 거 같으면 미리 벽에 걸린 달력에 그날 날씨를 간단히 메모해 두었다. 밀린 일기의 내용엔 날씨가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날 날씨만큼은 솔직하게 쓰고 싶었을까? 그렇게 국민학교에 거의 강제적으로 써야 했던 일기를 국민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안 써도 된다는 해방감이 너무 좋았다. 국민학교 졸업하는 순간 일기는 더 이상 숙제의 대상이 되지 않았기에 그것만으로도 중학교 입학한 사실이 기뻤었다. 적어도 내겐 일기가 그렇게 강박적인 숙제였던 모양이다. 일기의 해방감에서 벗어났지만 친구에게서 받은 일기장은 또 다른 간극이었다.


숙제 차원으로 써야 했던 일기와는 다른 나만의 감정을 언제든 쓸 수 있다는 일기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이었다. 보다 솔직하고 매일 쓰지 않아도 되지만 내 감정에서 만큼은 밀도 있게 쓸 수 있다는 것은 이 일기장을 받고 나서 더욱 선명해졌다. 일기장은 이렇게 나와 벌써 삼십 년 하고 삼 년째 함께하고 있다. 이젠 더 이상 그 일기장엔 쓰질 않지만 아직 공간은 남겨 두었다. 언젠간 다시 그 나머지 공간을 채울 수 있는 날들이 다시 오기를...


사춘기 감성이 가득한 그 일기장은 옷장 깊숙이 묻어둔 채로 나랑 함께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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