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이른 아침 10시도 안 된 시간에 윌리암에게 갑자기 문자가 왔다. 정말 큰일이 터졌다고 한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바로 받은 그는 "타라, 잠깐만. 나 지금 스트레스 때문에 숨이 안 쉬어져."이라고 하며 몇 번 숨을 고르더니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8시 30분에 파트너사와 미팅이 있었는데 그쪽에서 엄청 압박을 가해왔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상황설명을 했다.
더 큰 문제는 파트너사가 굉장히 화가 나서 윌리암의 상사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상사에게 보고를 넣지 않으면 본인이 직접 이메일을 쓰겠다고 한 모양이다.
타라, 나 정말 어떡하지?
나 이것도 잘못한 거 같고 저것도 잘못한 거 같은데
아... 정말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일을 하다 보면 생각지 않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들 사이에서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마찰이 생길 수 있다. 즉, 내가 아니라 슈퍼컴퓨터여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거다. 단지,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본인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면 패닉에 빠진다. 비록 어렸을 때였긴 하지만 식은땀이 나던 패닉의 순간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때 남동생이랑 피아노 수업을 마치고 화장실에 갔다가 집에 가려는데 화장실에 장난을 치고 싶은 거다. 그래서 가방에 있던 수채화 물감으로 거울에 그림을 그리고 동생이랑 킬킬대면서 집에 가는데 피아노 선생님과 딱 마주쳤다. 선생님은 우리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셨고 마침 화장실에 가시려는 길 같았다. 내 동생과 나는 순간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때 내가 선생님께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누가 화장실에 장난쳤어요!
마치 남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야~ 정말 웃기는 애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거짓말을 해도 어떻게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놀라울 뿐이다. 내가 뱉은 내 말에 놀랐고 내 남동생도 적잖이 놀란 것이 느껴졌다. 화장실에 장난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잘못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거짓말을 한 그 골목과 선생님의 얼굴까지 나에게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때를 떠올리며 윌리암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었다.
첫째, 숨을 깊이 들이쉬고 상황을 잘 짚고 정리해보자.
윌리암은 매우 논리적인 친구다. 덕분에 그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상황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해주었다. 특히, 현재의 가장 큰 문제, 왜 발생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본인이 할 수 있어서 한 일과 할 수 있었지만 못한 일을 나에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상황이 잡히면 해결책도 잡힌다.
둘째, 객관적이 되자.
들어보니 윌리암이 지레 겁을 먹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심리적 압박) 그래서 객관적으로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이는 현재 상황을 재해석해서 들려주었다. 그 친구가 생각하는 (본인이 잘못한 것이 과대 해석되는) 그런 상황이 아님을 설명하니 본인도 납득이 되었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의했다.
그러니 상황의 객관적인 분석이 되기 전까지 급하게 바로 해결책부터 찾으려고 단계를 뛰어넘는 것은 하지 말자. 엉뚱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시간이 낭비되고 잘못된 해결책이 나온다. (자꾸 이거 할까 저거 할까 라며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해주었는데 내가 듣기에 그 모든 해결책들이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
셋째, 핵심을 해결하라.
현재 사안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매니저에게 중간보고 및 공유를 제대로 하지 않은데 있었다. 일은 언제든 틀어질 수 있어서 일이 잘못된 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다만,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을 하지 못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성실하게 그동안 팔로우업/ 업데이트했다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이는 게으름의 표본이자 업무의 기본을 하지 않은 것이라 할 말이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하라고 했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그 사안을 무게 없이 담백하게 기존의 업데이트처럼 가볍게 우선 하라 이거다. 중요한 것은 지금 벌어진 사안의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인지 파악되으니 그거 하나를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마지막으로 오늘이라는 주어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네 선에서 해결해보라는 것이다.
파트너사는 재정적인 손해가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감정적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하는 거지 너를 인신공격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무엇보다 네가 파트너와 나눈 대화에서 네가 사실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파트너사는 전혀 인지 하지 못하고 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그것을 정확하게 다시 한번 알려야 한다. 즉, 그가 이렇게 흥분함으로 인한 득과 실을 제대로 인지하면 그렇게 응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차분하게 생각하면 해결책이 없는 문제는 없다. 알지만 그 상황 안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기 어렵다.
종종 나는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잠시 일을 중단한다. 아예 책을 읽던지 다른 것을 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그 사건의 비중이던지 그 일을 보는 내 시각이던지 둘 중에 하나는 달라져 있더라.
침착하게 마음을 다 잡고 보면 해결책이 없는 문제는 없다.
p.s. 결론적으로 정말 별일 아니었고 잘 해결되었고 이제 윌리암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잊고 잘 지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