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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리셔스 Nov 18. 2023

교생선생님의 밤

-포기란 없습니다-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수업을 평가하는 내 눈에도 동공지진이 일어난다. 

교생선생님은 애써 침착하려 하지만 벌써 머리가 하얘진 것 같다. 학생들은 이 틈을 놓칠세라 여기저기 신나서 질문을 한다.

 "선생님, 저는 십자인대 파열을 영어로 쓰고 싶어요. 십자인대 파열을 영어로 알려주세요. " 

교생선생님을 K.O 시키는 한방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울먹이는 모습으로 그녀는 말했다. "수업 망한 것 같아요." 세상을 잃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해줄 말은 "괜찮아요. 이따 협의회 때 만나요" 뿐이었다. 짧은 쉬는 시간 사이 온갖 감정을 다 겪고 있는 그녀에게 섣부른 위로도 할 수 없었다. 


협의회 시간이 되었다.  

몇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했던 영어 수업을 나락으로 평가하고 있었나 보다. 만족하지 못한 수업을 상상 속에서 더 최악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젯밤 수업에 쓰려고 밤새서 만든 학생들 코끼리 머리띠를 못 가져왔어요." 풀이 죽은 소리로 말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한 선생님이다. 지도안도 미리 써서 계속 나에게 조언을 구했었다. 수업에 쓸 PPT는 아기자기한 캐릭터들이 예쁜 퀄리티 높은 자료였다. 수업시간에 할 질문들과 예상 답변들을 시나리오처럼 만들었다. 시나리오는 얼마나 만지작 거렸는지 손때가 가득 묻어있었다. 종이가 구깃구깃 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 시간의 수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입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처음에는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어요. 이런 과정이 있어야 내일 더 좋은 수업 하는 거 아니겠어요? 처음부터 너무 잘하려 하지 마세요.
포기만 하지 않으면 돼요."




15년 전, 나의 교생시절이 생각난다. 즐거운 생활 수업시간이었다. 

봄 날씨에 맞는 음악과 봄을 느끼는 옷차림에 대해 배우는 주제였던 것 같다. 나는 패션쇼를 메인으로 잡았다. 아이들이 준비한 패션쇼 소품을 가지고 봄을 제대로 느껴보는 활동을 꾸미려고 했다. 음악도 준비했다. 며칠 동안 수업에 쓸 준비물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동선은 어떻게 짜야할지 고민했다. 학습지에는 동선에 대한 설명, 순서에 대한 설명 등등을 빼곡히 채워 나눠줬다. 모든 게 완벽한 준비였다.


수업이 시작되고, 초반에는 그럭저럭 정해놓은 흐름대로 흘러갔다. 이제 패션쇼만 잘 끝내면 되는 수업이었다. 나의 정성이 가득 담긴 학습지를 나눠줬다. 

그런데 웬걸. 2학년 아이들은 내 학습지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자신들이 들고 움직일 소품에 더 관심이 많았다. 패션쇼를 할 생각에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결과는 어땠을까. 말할 것도 없다. 망쳤다. 한 마디로 수업도 아니고 시장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소란한 장으로 끝나버렸다.

즐거운 생활 수업이 나에게는 전혀 즐겁지 않은 수업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날 많이 울었다.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2학년 아이들 수업내용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선생님이라고 자책했다. 그때 나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은 말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오늘 실수 아주 잘했어요.
그래야 좋은 선생님 돼요.    


그때는 그 말들이 내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내가 망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때 그 순간이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를 지도하신 선생님의 말 뜻을 이제 알 것 같다. 




교생실습 3주 차가 되자 교생선생님들의 눈은 피곤함이 역력하다. 밤마다 수업준비를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라고 한다. 계속되는 평가와 좌절, 끝났다는 환희와 다음날 또 다른 과목 수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감이 이들의 잠을 빼앗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실습이 끝나면, 푹 자고 싶어요."


난 그들의 밤이 안쓰럽지만, 한편으로 눈물 나게 아름답다.






오늘 그림책은 밤낮으로 노력하는 교생선생님들을 떠올리며 고른 책이다. 누구에게나 밤은 찾아온다. 어떤 이에게는 편안한 휴식의 시간이 밤이다. 또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날을 도전하기 위한 열정의 시간들이다. 


책제목: The way home in the night  지은이: Akiko Miyakoshi


-줄거리 소개-
(토끼) 아이는 엄마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잠든 것 같지만 실눈을 뜨고 밤거리에서 이웃들을 관찰한다. 사람들의 밤은 어떠할까. 퇴근을 하는 사람들과 벌써 집에서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다양한 사람들의 밤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영어그림책에서 찾은 인생문장


Some nights are ordinary, and other nights are special. 
But every night, we all go home to b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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