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있던 1년 6개월 동안 워릭(Warick) 이란 작은 마을에서 1년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 육가공 공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시간을 보냈다.
내가 호주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고 한국직장 생활과는 다른 문화, 나라의 사람들과 같이 일하며 한국에서는 받아보지 못했던 급여에 열심히 일했던 많은 추억들을 쌓았던 곳이다.
1년 동안 일하며 소고기 공장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할 수 있었다. 육가공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큐 피버 접종 후 입사 당일 인덕션을 가진다. 소위 일종의 오리엔테이션 같은 견학 체험이다. 공장일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들과 공장을 전체적으로 한 바퀴 돌면서 근무방식과 환경을 직접 보면서 공정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공장을 둘둘러보면서 중형차보다 몸집이 큰 소 한 마리가 소고기 한 팩이 되기까지 수많은 공정과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눈으로 직접 보면서 신기해했다. 소를 도살하는 킬플로워를 견학할 때 제일 기억에 남는 것들이 많았다. 킬플로워는 소를 기절시킨 후 목을 긋는 것을 시작으로 뿔이 잘려나가고 발굽이 잘리고 가죽이 벗겨지는 등 처음으로 마주하는 잔혹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지만 속은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그때 드는 생각이 인간은 악마에 제일 가까운 동물임이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워커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위, 아래로 흰 옷을 입었지만 일을 하며 튀기는 피가 얼룩져있었다. 그들은 하도 많은 소를 잡아 아무 감정도 없는 듯 사정없이 칼질을 했고 반복되는 과정이 지루한지 차분한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서 영화에서 보던 살인자의 모습이 제멋대로 오버랩되었다. 그때는 겁을 먹었지만 나중의 내 모습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수많은 워커 중 여자 워커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킬 플로워는 피 냄새가 진동하며 내부가 습하고 더우며 일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남녀 누구랄 것도 없이 튀키는 피와 지방 덩어리를 몸에 묻히며 일하고 있는 광경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여자와 남자의 역할과 영역의 선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면 호주에서는 보다 균형적이었다. 성별보다는 능력위주의 업무방식으로 진행됐고 한국에서 일해왔던 환경과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며 수행했던 포지션은 팩커, 슬라이서, 청소부, 가죽 손질, 냉동창고, 물류 창고직 등을 수행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중에 적당한 영어 실력과 건장한 체격 덕분에 나는 여기저기 지원을 다녔다녔다. 한마디로 동네북이었다. 힘든 파트에 팔려갈 때면 시무룩했지만 지나고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시간들이 다양한 경험이었다.
가끔씩 물류창고로 지원을 나갈 때가 있다..
압축 포장된 수출 전의 박스를 정리하는 일을 하거나 영하 36도의 냉동창고에서 박스를 정리하는 데 냉동창고에 갈 때면 장갑에 마스크에 두꺼운 점퍼를 입고서 일한다. 입장한 지 5분이 지나지 않아 눈썹에 하얀 눈이 서려진다.
컨베이어를 타고 무거운 박스가 오면 번호별로 차곡차곡 쌓는데 영하 36도임에도 땀나도록 힘들다. 워커 중 남아공에서 온 흑인 친구 에디는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 동료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가끔씩 내게도 말을 걸어온다. 대화중 90%는 여자 이야기다. 동양인 여자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인 여자 워커들을 중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데 나에게 그의 안부를 묻는다. 자기가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다며 보닝룸으로 돌아가면 나에게 물어봐달라고 한다.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알겠다고 한다.
또 한 번은 가죽 손질을 하는 곳에 지원을 나갔다. 장소는 무슨 영화에나 나올법한 허름한 야외 창고에 나포함 5명 이서만 임했다. 원통형 배수구 같은 곳에서 소가죽이 물에 씻겨져 올라온다. 올라온 소가죽을 넘겨 펼쳐 머리가죽을 잘라내고 양쪽 다리 가죽을 잘라내고 꼬리를 잘라내는데 가죽이 보통 질긴 게 아니다. 칼이 날카롭지 않은 나는 낑낑대며 따라가기 바빴다. 야외여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곳 워커들이 노하우를 알려주고 도와줘서 간신히 따라 일했다. 위생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서라서 인지 가끔씩 담배를 입에 물고 일했다. 그 모습이 정말 어디 텍사스에 황량한 땅의 창고에서 살인청부업자 출신의 사내가 손을 씻고 정육점을 차린 느낌이랄까 머릿속에서 쓸데없는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여긴 호주인데 말이다.
점심시간이 다 돼가면 워커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자기 일을 급하게 끝내고서 점심시간에 맞게 바로 튀어나갈 준비를 한다. 외국인도 점심시간은 그런 존재인가 보다.
점심시간에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 오지인들은 생각보다 많이 먹지 않았다. 덩치는 엄청 큰데 손바닥만 한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이 뭔가 묘했다. 오지인들은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반면 동양인의 도시락은 오지인에게 신기한 음식이었는지 동양인 워커들이 무엇을 먹는지 궁금해한다.
한 번은 3분 짜장을 데워 밥에 끼얹자 옆에서 샌드위치를 먹던 오지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 영어로 짜장을 어떻게 설명하지? 생각에 잠겨있는데 오지인은 똥 같다며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내가 맛있게 비벼 먹는 모습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공장 내 오지인들은 서로 대화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때는 상관없었다 젊은 청년과 흰 수염의 할아버지라도 그들은 일하며 대화하였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을까? 아쉽개 나의 리스닝 실력은 그들의 억세고 빠른 말을 이해할 정도로 좋지 못해 아쉬웠다. 한국에서는 그냥 조용히 일만 하는 느낌이었는데 이곳의 사람들은 생기 가득하고 활기찬 시장에서 일하는 기분이었다.
하루는 소고기를 포장하는 패킹(Packing) 업무를 했던 날이다. 슬라이서가 잘라서 던져주는 소고기를 포장봉투에 알맞게 담아 상자에 넣어주면 되는데 이때 소고기를 담을 상자를 제공하는 박스 보이가 있다. 박스 보이를 담담하는 키미라는 고모뻘? 의 오지인이었는데 작고 호리호리한 체구의 오지 아주머니였다.
그날 유독 바빠 보였다. 내가 맞은 파트는 여유롭고 힘들지 않아서 정신없어 보이는 키미를 중간 중간도와주었다.
정신없이 일하던 키미가 내가 도와주는 것을 알게 되자 나에게 다가오더니
"도와주지 마 이건 내일이야!" 하고 휙 가버렸다가 그런데 다시 돌아와서는
"어쨌든 고마워!" 하고 하던 일을 마저 하러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순간 1초 정도 당황하여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하며 다시 곱씹어 보니 기분이 언짢으면서 무언가 멋있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컬크 러시인가? 책임감 있는 모습이 멋있게 느껴져 그렇게 기분이ㄹ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일했던 공장이 좋은 이유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다들 기계처럼 눈앞에 보이는 일을 처리하기 바쁜데 이곳은 전통시장을 방불케 한다. 각자의 일을 하며 사람들은 그 틈에서 서로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했다.
신나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투닥투닥 말싸움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일명 팩폭이라던지 회심의 드립이 모두의 공감을 사면 다들 소리 지르는데 영화 8마일에 나오는 프리스타일 랩 배틀의 무대로 바뀐다.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리더와 직책에 맞게 행동하는 오지인들의 태도가 맘에 들었다. 우리나라는 계급이나 나이를 이용한 공경을 잘못표현한 부조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호주는 다르다.
내가 봤던 호주는 능력제에 가깝고 그 자리에 맞게 행동하고 그 무게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사람 됨됨이와 능력을 갖추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자리를 얼마든 만들어나갈 수 있겠다고 이곳에서는 그렇게 느꼈다. 처음에는 나 같은 외국인 노동자를 좋지 않게 보지않을까 했는데 그들은 나의 사소한 의견도 눈높이에 맞춰 귀담아 들으려 했고 칭찬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안면이 트면서 먼저 다가와 이야기를 하고 주먹인사를 하는등 그들에게서 사람냄세가 났다.
평소 장난꾸러기의 모습과 가볍게 행동하던 워커도 그에 맞는 자리에 오르자 일에 대한 진지함이 더욱 묻어나오며 프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전까지는 느껴 본 적 없는 분위기였다. 한국에서는 일에 찌든 눈동자에 책임을 떠안기 싫어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는데 남들이 좋지 않게 볼 수도 있는 육가공 공장에서 그들은 자신의 일에 진지하고 책임을 다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 때문에 피로감을 느끼기보다 일을 하며 활기를 찾는 느낌이었다.
공장에 일년동안 일하며 한국이 었다면 바라기 힘든 급여를 벌었고 다른 문화의 친구들을 사귀고 함께 일하는 시간과 경험이 그때 당시에도 값지고 특별하다 생각했는데 호주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시간이 지난 지금 나에게는 더욱 값진 경험이 되었고 가끔씩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짖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