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의 가르침 비판: 옆집 남편과 몸값경쟁은 이제그만

너는 네 몸값과 다르다. 끝없는 몸값올리기의 비극: 매트릭스 속 행복찾기

몸값이라는 말은 본래 연예인, 광고 모델, 스포츠 선수, 인질 등에만 사용되었으나 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값은 인간 시장의 논리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사람이 되면 몸값이 비싸지고 다른 사람들이 별로 많이 찾지 않는 사람이 되면 몸값이 싸진다.
당신의 수입은 당신이 만들어 내는 부가가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부가가치의 창출 없이는 당신이 제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한다 하여도 당신의 수입이 올라야 할 근거가 없다. 만일 당신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면 당신은 회사나 고객이 볼 때 정말로 꼭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없어도 되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몸이 피곤하다고? 월급이 적어서 공부할 마음이 안 생긴다고? 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노력이란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기 싫어하는 것을 더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노력이란 싫어하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은 노력이 아니라 취미 생활일 뿐이다. 노력하라. 기회는 모두에게 제공되지만, 그 보상은 당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차등적으로 이뤄짐을 명심하라.
-세이노,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몸값이 오른다> 중.


'몸값'이라는 단편영화(감독 이충현)가 있다. 미쟝센 단편영화제,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고 드라마로 제작되었을 정도로 인기 있는 작품이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결말을 밝힐 수는 없지만, 제목 그대로 사람을 상대로 몸값으로 환산해서 흥정하는 과정이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사실 우리사회에서 몸값을 매기는 일은 성매매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여러분의 몸값은 얼마인가? 가족과 보내는 한 시간은 얼마의 가치를 가지는가? 얼마를 받으면 1년간 감옥에 갇히는 데 동의하겠는가? 이 글의 글값은 얼마일까? 몸값에 집착하느라, 진짜 중요한 마음과 정신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13년 전 서점을 휩쓸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다. 당시 자기계발서라는 장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고 알려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에도 메시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춘에는 누구나 아프고 힘들지만 배우고 노력해서 어려운 경쟁을 이겨내고 결국 성공을 쟁취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에는 적어도 위로와 공감, 독려의 메시지가 있었다. 적어도 채찍질을 하면서 몸값을 높이라고 닦달하지는 않았다.


2023년 히트를 친 <세이노의 가르침> 역시 자기계발서인데, 여기서는 위로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는 노력은 사실 노력이 아니라 취미생활이고 핑계에 불과하다. 그의 논리는 '좋아하는 일'로 몸값을 높일 수 없으며, 몸값을 높이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과제이고, 실제로 몸값은 부가가치에 따라 정확히 책정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긴장감이 필요해서 단기적으로 독설과 쓴소리를 찾아 듣는 게 잘못은 아니다. 고카페인을 들이부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관이 정말 사실에 부합하는지, 인간 삶에 유익한 것인지는 비판적으로 검토해 봐야한다. 매일 카페인 중독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저서 <일을 잘한다는 것>으로 유명한 경영학자 구스노키 켄은, "좋아하지 않는 일에선 감각이 자라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감각', '적성'이란 추상적인 말처럼 보이지만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다. 구스노키 켄에 따르면, 앞으로의 선진국형 사회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잘 알고 집중하는 전략이 시장에서도 더 중요해질 것이다.


나는 몸값을 올리기 위해 8시간 근로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세이노의 주장을 읽고 아래와 같은 농담을 떠올렸다. 우리는 인간들의 몸값을 책정하고 좀 더 비싸게 팔리려고 경쟁하기 이전에, 분배구조가 제대로 되어있는지 먼저 질문해야 하는 것 아닐까? 초과근무, 지속적인 과로로 혹사당해서 건강을 망치고 몸값이 떨어지면 쫓겨나는 사례들은 결코 낯선 장면이 아니다.


어느 날, 우리 회사 사장님이 엄청 비싼 롤렉스 시계를 차고 출근했다. 나는 "와, 정말 멋진 시계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대답했다. "네가 더 끈질기게 매 시간, 매사에 최선을 다해 일하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고, 목표를 초과 달성하기 위해 인생의 모든 시간을 투자한다면, 몇 달 안에 '나는' 또 다른 롤렉스를 살 수 있을 거야."



생각해보자. 돈을 추구한다고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인생에서는 운이 가장 중요하다. 운을 통제할 수 없으니 일단 노력을 하는 게 맞다고? 노력도 비용이 드는 일이다. 노력도 노력을 보상해주는 사회에서 해야지, 괜히 노력만 하고 보상은 못 받는 호구가 될 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점점 노동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말한다. 토마 피케티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노동 소득의 비중은 낮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패배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세이노의 가르침대로 누군가 "8시간 근무에 집착하지 말고, 일단 몸을 갈아넣어서" 부자가 되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치자. 정작 현실에서 그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세이노는 독자들에게 노력하라고 일침을 놓기 이전에, 노력해서 예측가능한 부를 달성할 수 있는지 구조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것 아닐까? 노력하기 싫어서 불평하려는 게 아니다. 노력지상주의의 가장 큰 잘못은 구조적 문제를 감추고 도외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국가에서 농노와 노예들은 '속전'이라는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면 자유민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물론 그 돈을 모으려면 몸을 갈아넣어야 한다. 드물게는 엄청난 생산성과 절약으로 속전을 내고 자유민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에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속전(贖錢)은 우리말로 몸값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죄를 지은 사람이 처벌을 면하기 위해 내는 돈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세이노의 가르침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노예주가 노예들에게 얼른 돈을 벌어서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민이 되라고 연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생 돈에 시달렸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돈(금화)은 주조된 자유다. 호주머니에서 돈이 짤랑짤랑 울리면 쓰지는(사용하지는) 못하더라도 절반 정도는 위로가 된다." 우리는 모두 자유민이 될 수 있을까? 사회 시간에 국민은 모두 자유를 가진다고 하지 않았었나?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돈이 곧 자유라면, 돈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없는 것이다. 자유가 없는 사람을 노예라고 부른다. 따라서 돈과 자유가 동일시되는 사회에서는, 돈이 적절히 분배되지 않는 한, 어딘가에 노예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샤일록과 같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을 돈의 노예라고 부르기도 한다. 돈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더라도 더 많은 자유를 갈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적대로, 돈을 가지고 있으면 뭔가 미묘한 위로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옆에서 더 큰 금화 소리가 들린다면? 그런 위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박탈감과 분노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돈으로부터 오는 위로는 온전할 수 없고 언제나 반쯤 공허를 남기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부자의 정의가 무엇인지 중요한데, 넉넉하게 상위 30% 정도를 부자라고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모두 상위 30%의 부를 가질 수 있을까? 절대로 불가능하다. 논리적인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비교라는 게 원래 그렇다. 모든 학생이 90점을 받을 수는 있지만 모든 학생이 2등급을 받을 수는 없다. 부와 자산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절대평가인가, 아니면 상대평가인가? 세이노는 계속해서 몸값을 높이라고 하는데, 높다는 말 자체가 이미 낮다는 개념과의 비교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꿈과 비전을 가지고 성장하려는 태도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세이노의 관점은 과거의 자신과의 비교가 아닌 동시대의 어리석은 이들과의 비교를 계속해서 부추긴다. 당신은 옆집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으니 안주하지 말고 달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정을 위협하고 행복을 박탈한다는 문제가 있다.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는 재치있는 가사로 이러한 몸값, 연봉 위주의 사고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1994년 서태지는 그런 '가르침'은 됐다고, 거부한다고 선언했지만 30년 뒤 똑같은 가르침이 2023년 대한민국 서점가를 점령했다. 서태지는 갔지만 세이노는 왔다. 이제 그런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몸값을 올려라, 부자가 되라, 더 많이 일하고 공부해라 라는 말은 사실 새로울 것 없다. 그래도 대학이라면,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희망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안타깝게도 우리 대학 공동체는, 희망은 커녕 서열화와 물질주의, 가난 혐오를 제일 먼저 주도해 왔던 것은 아닐까 성찰하게 된다. 대학 교수뿐만 아니라 대학생들도 반성할 지점이 있다. 이제 돈 앞에서 근엄한 건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행복을 되찾고 싶다면 물질에 의해 붕괴된 가치질서를 재건하고 회복하는 방법밖에 없다. 더 이상 근엄한 척 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수가 있어

됐어 됐어 이젠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이젠 족해 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면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채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건
좀 더 솔직해봐 넌 알 수 있어
-서태지, <교실이데아> 중.



몸값 경쟁과 자기계발 열풍은 모든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일까? 한국인의 민족성에 박혀 있어서 바꿀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IMF 이전과 이후는 아예 다른 세상이라고 여겨진다. 문화는 매우 느리게 변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때로는 매우 빨리 변신한다. 멀쩡한 인간이 어느 날 아침 벌레가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김미경 강사는 IMF 전후의 변화를 직접 체감한 사람으로서 '몸값'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지금 40대들이 아직 대학생이거나 사회 초년생이었던 시절 IMF 사태가 터졌다. 당시 초보 강사였던 나는 IMF 전후의 사회 변화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전에는 회사가 ‘평생직장’이었고 직장 상사는 다 ‘형님’이었다.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워낙 강해 상사가 퇴근을 못 하면 같이 야근을 했다.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시다 출근 전 사우나에 가는 것도 흔한 풍경이었다. 그 시절 이직은 천인공노할 배신자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개인이 시간과 돈을 써가며 굳이 자기계발을 할 이유가 없었다. 나를 키우는 건 오로지 회사의 몫이었고, 당시 유명한 자기계발 강사는 전부 기업 연수원에 있었다.

그런데 IMF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평생직장이라는 공식이 깨지면서 처음으로 ‘몸값’이라는 단어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함께 입사했어도 개인의 능력에 따라 연봉이 달라지고, 연봉을 높이기 위한 이직도 익숙한 일이 됐다. 주5일 근무는 여기에 불을 붙였다. 시간이 많아지면서 직장인들 사이에서 자기계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김미경의 마흔 수업> 중.

한국인은 원래 비교를 좋아하고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저열한 민족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는 분위기와 문화는 그저 이 순간에 여러 우연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바꿀 수 있다. 전쟁과 재난이 상처를 남기는 것처럼, 경제적 충격은 우리 사회와 시대정신에 큰 상처를 남겼다. 우리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 이제 그 원인과 상처를 직시해야 한다. 경쟁에서 조금만 뒤쳐져도, 나의 생물학적 욕구와 최소한의 안전마저 보장되지 않는다는 공포 속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러한 정글 상태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계속해서 몸값을 올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결코 정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복잡한 제도는 일단 정치인과 지도자들에게 맡겨놓자. 일단 우리가 해야 할 건, 우리를 숫자와 몸값으로 환산하려는 가르침을 거절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다른 건 못해도 그런 실존적인 판단은 각자가 하는 수밖에 없다.


오해하지 말자. 능력을 키우지 말라거나, 자기계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갓생 살지 말고 미라클모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각자 인생의 초점이 몸값과 연봉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각자의 행복, 주체성, 취향, 자기만족, 자아실현, 사회기여, 삶의 의미를 목표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 그들을 비난하지 말자. 그들의 인생을 값으로 환산해서 조롱하고 공격하지 말자. 때로는 그러한 자세를 배워서 우리 인생에도 적용시켜 보자. 그러다 보면 우리 몸값도 따라서 오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구도 그걸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몸값에 집착하는 삶보다 더 나은 점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어떤 수험생의 유튜브를 봤다. 회사를 그만두고 회계사였나 세무사였나 고시 공부를 한다고 한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을 늘 응원한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으니 좀 씁쓸했다. "제가 평범한 회사에 다니다가 결혼해서 집을 구했는데, 만일 옆집 사는 이웃의 남편이 회계사면 저 스스로가 괴로워서 못 견딜 것 같아서요." 워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런 식의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솔직한 말이면서도 안타까웠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다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회계사로 모자라서 변호사도 가지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의사도 가지려고 한다. 일본의 어떤 유튜버는 의사, 변호사, 회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꿈을 가지고 성장하려는 모습은 매우 좋다. 하지만 이웃집 남편에게 지지 않으려고 회계사를 딴 뒤에는, 옆나라 사람에게는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언젠가는 이 짓을 그만둬야 한다. 자기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적절한 선은 도대체 어디일까.


위와 같이 생각하는 가상의 청년을 철수라고 해보자. 철수의 사례에서도 하나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철수가 회계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서이다. 돈 때문에, 내 몸값을 높이려고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는 법인이다. 재무학에서 회사의 최대목표는 매출이나 순이익, 인지도가 아니라, 가치 극대화다. 가치를 정의하는 방식은 자기자본가치, 기업가치, 이해관계자가치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무튼 기업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고, 따라서 특정한 목적을 부여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법인이 아니라 자연인이다. 부모가 자녀를 출산할 때 무슨 의미와 삶의 목적을 부여해줄 권한은 없다. 그걸 결정하는 건 자기 자신이다. 자기 몸값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하기 이전에, 과연 내가 내 몸값을 높이려고 사는 게 맞는지 고민해봐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나 자신을 비싸게 팔아넘긴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보람있는 삶이 될까? 주식회사, 법인에는 주주와 채권자가 있지만, 내 삶의 주인은 나밖에 없다. 부모, 이웃, 주변인들은 기껏해야 채권자나 이해관계자밖에 안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기 몸에 대한 소유권과 결정권을 넘기는 것을 우리는 노예제도라고 부른다. 노예주는 노예의 몸값에 관심이 무척 많다. 노예가 행복하건 말건 그런건 관심이 없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도외시하고 몸값을 높이는 데 혈안이 된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노예로 예속시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신에 등극한 '돈'을 섬기기 위한 것 아닐까.


행복은 소득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이스털린의 역설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스털린보다 앞서 행복에 대해 연구한 권위자로 경제학자 레이어드 교수가 있는데, 1980년 발표한 레이어드의 논문에 대해 리처드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은 “행복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쓴 최초의 논문”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이는 레이어드 가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근 스티븐 핑커 등이 레이어드와 이스털린에 대해 비판하며 소득은 행복과 여전히 연관이 있다는 비판을 하면서 여러가지 논쟁이 촉발되기도 했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일단 레이어드의 관점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레이어드 교수는 영국 복지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서, 행복 황제(Happiness Tsar)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Ted X Oxford 강연에서 자기의 관점을 흥미롭게 설명한 바 있다. 레이어드 교수는, 사회의 주요 목표가 부의 증가여야 한다는 개념에 도전하고, 대신 진정한 초점은 행복을 극대화하고 불행을 최소화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행복을 위한 핵심 요소로서 양질의 인간 관계와 정신 건강이 더 중요하며 이는 과학적으로도 검증되었다고 말한다. 레이어드는 소득이 행복 수준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입장이고, 따라서 과도하게 경쟁적인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행복에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정부는 정신 건강 서비스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학교에서는 학업보다는 인격 발달을 촉진하고, 부모와 가정을 지원하고, 낮은 실업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한다. 아직 이러한 관점이 주류 경제학에서 통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이란 경제학이 소홀히 해서는 안될 가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여러분의 두뇌 중 표준 보상센터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다른 종류의 보상에도 반응하는 시스템인데요, 따라서 인간은 남을 도울 때 말 그대로 쾌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습니다. 만약 인간 뇌 구조가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하고 있는 모든 설교는 아무 가치가 없었겠죠. 그래서 우리는 '행복을 위한 행동'이라는 운동을 창설했습니다. 제가 먼저 깃발을 올리려고 합니다. 행복을 위한 행동. 이 운동은 제가 오늘 말씀드린 모든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고, 저는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거라고 믿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 100명 중 틀림없이 당신보다 언제나 일의 결과가 객관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8시간 일하여 얻은 결과를 당신도 같은 시간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10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10시간씩 일하고 그 2시간 차이가 어떻게든 줄어 없어지도록 추가로 시간을 투여하여 지식을 습득하면서 스스로를 좀 더 훈련시켜야만 한다. 즉, 당장 하루 열 몇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하여야 당신도 그 일 잘하는 사람과 비슷한 단계에 오르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이 간단한 사실을 왜 무시하는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고소득층이 일을 많이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하는 것을 즐길 뿐 아니라 자신의 경쟁자들을 이기려는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를 볼 때 과로사하는 사람은 주로 고소득층이 아니라 40~50대의 평범한 봉급생활자들 이며 대부분 일을 즐기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중산층이나 저소득층이다.
-세이노, <8시간 근무에 집착하지 마라> 중.


세이노의 가르침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돈을 추구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지독하게 우연적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자본의 관점에서 보자면, 천만의 말씀이다. 이 세상 일의 대부분은 운으로 돌아간다. 세이노 선생이 엄청난 자산가가 된 과정에서도 엄청난 행운이 있었을 것이다. 노력을 강조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운의 비중을 축소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 세이노에 따르면, 노력은 하기 싫은 걸 하는 거다. 어쩌면 약간의 보상이 따라올 수도 있을 것이다. 잠깐은 유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저차원적인 욕구를 무한히 팽창시킨다


하지만 그런 삶에서 의미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는 하고 싶은 걸 할 때 발견할 수 있다. 세이노의 표현대로라면, 노력하지 않아야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그래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때로 의미와 함께 돈까지 따라오기도 한다. 매슬로우의 삼각형을 생각해보자. 위의 계단모양 피라미드는 내가 변형한 그림이다. 자본주의적 욕구는 끝이 없다. 얼마 정도가 있으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까? 1억? 5억? 10억? 돈을 더 벌어서 피라미드의 위칸으로 넘어가는 건 결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들의 피라미드는 더이상 피라미드가 아니고 1, 2층의 저차원적 욕구만 무한히 팽창하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SNS는 새로운 음식, 옷, 집, 자동차를 보여주고 추천할 것이다. 그런 가르침을 좇아서 진정한 가르침과 자아실현에 도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오히려 저 피라미드를 뒤집어야 한다. 그러면 작은 노력으로도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맛볼 수 있다. 과연 불가능한 걸까? 피라미드는 단단하게 고정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피라미드가 SNS와 온갖 자본주의적 환상으로 왜곡되어 왔던 것을 직접 관찰하지 않았는가. 아래층이 무한히 팽창할 수 있는 신축성 있는 피라미드라면, 깨달음을 통해서 피라미드의 구조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 두 가지 피라미드 구조물에 물을 채운다고 생각해보자. 위층으로 가고 싶다면 아래층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똑같은 소득을 가지고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사는 건 욕망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들 자아실현과 궁극적인 행복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피라미드 아래층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각만으로 자기의 욕구 체계를 바꾸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영화 매트릭스 속에서 주인공들이 총알을 피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총알은 어차피 허상이기 때문에 피하려면 피할 수 있다. 시기와 질투, 물질에 대한 숭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우리는 뒤집어진 피라미드에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에서 인간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물질은 유한해도 예술과 철학과 사랑과 우정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매슬로우의 삼각형을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적은 자원으로도 저차원적 욕구를 해결하고 남는 인생은 고차원적 활동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They Live>의 한 장면


존 카펜터의 1988년 영화 <They Live>에는 흥미로운 설정이 나온다. 화성인들이 몰래 지구에 잠입해 돈을 통해 정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특수한 선글라스를 통해 이 세계의 진실을 볼 수 있는데, 광고판에는 "Obey"(복종하라) 라고 쓰여 있고, 돈에는 "This is your God"(이것이 너희의 신이다) 라고 쓰여 있다. 우리 지구인들은 수천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문명을 이끌어 왔지만 그 아름다운 가치들을 모두 화성인에게 빼앗길 운명에 처해 있다. 물론 나의 선글라스만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공감받기 어려운 생각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설득하고 싶다. 그쪽 길에는 행복이 없다. 우리는 행복을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몸값과 결코 같지 않다.

단편영화 '몸값'의 교훈은 이런 식이다. 값어치를 매기는 세상은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다. 돈으로 몸값을 계산하는 관점은 쿨하고 똑똑해 보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승리하는 건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인간이 개발해낸 희대의 발명품인 "자본과 물질" 그 자체의 군림일 뿐이다. 몸값에 집착하지 마라. 몸뚱이는 어차피 죽어 없어진다. 몸값을 높이려 애쓰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은 피폐해지고 있다. 왜 마음에는 값을 매기려 하지 않는 걸까? 우리 인간들은 어리석은 계산으로 자기의 소중한 삶을 갉아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계속)


P.S. 이 매트릭스적 세계와 역사는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까? 나는 어떤 위대한 정치가나 지도자, 판사, 사업가가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도 없고, 사람들의 생각이 그대로인데 세상이 좋게 변할 리도 없다. 법과 제도를 관철하고 복종하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위대한 철학자나 예술가, 작가, 영화감독이 나타나서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성찰하고 납득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인간의 이성과 감성, 문화, 예술성, 윤리, 사랑과 우정을 포착하고 창작하고 표현해야 한다. 지난 2019년 영화 기생충 열풍을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은 영화 오락을 즐기면서 동시에 여러가지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태지, 비틀즈, 윤동주, 카뮈, 버지니아 울프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류는 자랑스러운 문화 자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책이 많이 읽혀진 것이 좋다. 그 냉혹한 가르침은 언젠가 붕괴되고 그 자리에 누군가 행복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을 세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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