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이 곧 인류의 지성사가 된 한 남자의 어린시절 이야기
어떤 인물이든, 어린 시절의 경험은 평생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깊은 자취를 남깁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나는 런던에서 태어났고(영어원문: ‘I was born in London...’), 그 시절이 내 삶의 궤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Autobiography, Chapter 1)라고 술회했습니다. 1806년 런던에서 태어난 밀은 사회적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가정사 속에서도, 아버지 제임스 밀(James Mill)이 지녔던 강인하고 철저한 교육관 아래 조금도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유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특히 그는 어릴 적부터 책과 가까이 지내며, 별다른 놀이 도구나 흔한 동화책도 거의 없이 역사서, 철학서 등을 ‘직접 읽고 보고 쓰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훗날 또래보다 훨씬 앞선 지식과 사유 능력을 갖추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고 그는 회고합니다.
제임스 밀은 『영국령 인도사(History of British India)』의 저자로 잘 알려진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였습니다. 밀의 표현에 따르면 “아버지는 나의 교육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거의 모든 시간’은 단순한 과외 수준이 아니라, 아들이 읽고 쓰는 순간순간까지 지켜보면서 어휘와 문법, 개념 이해 등을 하나하나 교정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어 사전이 없던 당시, 밀은 “내가 모르는 그리스어 어휘를 볼 때마다 인내심이 없는 아버지에게 일일이 묻고 의지해야 했다”(영어원문: “I was forced to have recourse to him for the meaning of every word...” ) - (Autobiography, Chapter 1)라고 썼습니다. 아버지는 바쁜 저술 활동 속에서도, 글쓰기를 하던 바로 그 방에서 어린 밀에게 그리스어와 역사서를 가르치며 자신의 세계관과 학문적 노하우를 자연스럽게 전수했습니다.
제임스 밀은 지식의 양적 습득에 그치지 않고, 아들에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무엇이든 바로 가르치지 않고, 내가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을 준 뒤, 불가피할 때에만 설명을 덧붙였다”고 밀은 기록합니다. 이 같은 방식은 짧은 시간에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정신적 압박도 있었습니다. 밀은 “아버지가 나에게 기대한 수준은 내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것이었다”고 솔직히 적었습니다.
이 교육 방침은 결과적으로 두드러진 조기 학습 효과를 낳았습니다. 그리스·라틴어 고전에 대한 이해는 물론, 역사·지리·수학·논리·정치경제학 등까지 폭넓게 다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격상, 자주 화를 내거나 엄하게 대하는 순간이 많았다는 점도 밀은 숨기지 않습니다.
아버지 제임스 밀은 아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폭넓은 독서 경험>을 시키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존 스튜어트 밀은 8세 이전에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등 주요 그리스 문헌을 통독했습니다.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글과 로마사에 큰 흥미를 느꼈으며, 그곳에서 영웅적 인물과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정신의 면모를 배웠다”는 내용이 밀의 회고 속에 등장합니다.
역사 분야에서도 그는 로버트슨(Robertson), 흄(Hume), 기번(Gibbon)의 역사 저술은 물론, 영국의 연감(Annual Register) 같은 사료들도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탐독했습니다. 밀 스스로 “당시에 읽는 책의 대부분은 어른들도 다 읽지 않는 어려운 저술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문명과 제도, 윤리, 심지어 종교 개혁 같은 주제까지 폭넓게 접했다”고 말했습니다.
밀은 “나는 그리스어를 언제부터 배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 살 때 이미 아버지가 카드에 적어 준 단어장을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영어원문: “I have no remembrance of the time when I began to learn Greek...” ) - (Autobiography, Chapter 1)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본격적인 문법 학습 없이 단어를 외우고, 바로 번역 실습을 통해 배우는 방식은 사실상 하나의 몰입식 언어 학습이었습니다.
8세 이후 본격적으로 라틴어를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밀은 동생들과 함께 라틴어 기본서를 떼고, 직접 가르치는 역할까지 부여받았습니다. 스스로가 교사가 되어야 했기에 “배운 내용을 더욱 철저히 복습할 수 있었고, 이는 내게 더할 나위 없는 교육 방식이었다”고 그는 회상합니다.
어린 밀에게 가장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이었던 과목은 논리학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 전체를 차근차근 읽게 했고, 이어 호브스의 논리학 저술로 넘어가게 했습니다. 밀은 이 과정에서 “부정확한 논증을 분석하고 어디에서 오류가 나타나는지 지적하는 능력을 키웠다”고 평가합니다. 이는 훗날 밀의 대표 저작인 『논리학 체계(System of Logic)』의 밑거름이 됩니다.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역시 밀의 지적 성장에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다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저술을 자세히 읽고,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주장과 비교·비판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내가 아담 스미스의 단순화된 설명을 따르지 않고, 리카도의 체계로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도록 요구했다”고 밀은 전합니다. 이론적 내용을 글로 요약하고, 다시 아버지에게 구두로 보고하는 <다층적 학습>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매우 돋보입니다.
밀이 밝히는 바에 따르면, 그는 “어릴 때부터 종교적 신앙이 없는 상태로 자랐다”고 합니다(영어원문: “I was brought up from the first without any religious belief...” ) - (Autobiography, Chapter 2). 그의 아버지는 전통적 기독교 교리, 특히 예정설이나 지옥의 존재를 주장하는 신학에 대해 강한 회의를 품었고, 그 때문에 아들에게도 특정 교리를 주입하기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합리적 고찰’을 요구했습니다.
도덕 교육 또한 종교적 기반이 아니라 고전 사상, 특히 그리스의 스토아·에피쿠로스 학파와 동양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도덕은 신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을 위해 진정 가치 있는 덕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이 아버지 제임스 밀의 생각이었고, 존 스튜어트 밀 또한 이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됩니다.
밀은 14세 무렵, 벤담(Jeremy Bentham)의 형인 사무엘 벤담(Samuel Bentham)의 초청으로 1년간 프랑스 남부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몽펠리에 지역의 ‘Faculté des Sciences’ 강의를 듣기도 하고, 현지 문화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학문적 시야와 인생관의 지평이 한층 넓어졌다>고 말합니다. “나는 프랑스에 체류함으로써 달리 살아가는 방식, 다양한 정치사상과 문화적 분위기를 직접 만났다. 영국과는 사뭇 다른 토론 태도, 개방적인 태도는 이후 내 글쓰기와 철학에 큰 영감을 주었다”고 그는 밝힙니다.
더불어 프랑스 체류 중 ‘사회적 연대감’과 ‘자유로운 비판 문화’가 깊이 몸에 밴 뒤, 영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공공 문제에 적극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밀의 후기 저작인 『자유론(On Liberty)』과 『공리주의(Utilitarianism)』 등에 결정적 흔적으로 녹아들게 됩니다.
(본 글은 [Autobiography, J. S. Mill (1873)]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