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깨우치고 성장해 나간 자기 교육(self-edu)의 발자취
(본 글은 인문학 전문서적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어린 존 스튜어트 밀은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예전 공부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학문들을 조금
씩 더해갔습니다. 당시 아버지인 제임스 밀은 『Political Economy』의 원고를 마무리하던 참이었고, 존 밀에게 "그가 ‘주변적 내용(marginal contents)’이라 부른 것은 문단마다 짧은 요약을 작성하는 방식"을 시키며(“making what he called ‘marginal contents’... a short abstract of every paragraph.” - CHAPTER III), 글의 아이디어 흐름과 전개 방식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글쓰기 훈련은 사유와 조직 능력을 동시에 키워주었고, 아버지는 그 과정을 지속적으로 검토하며 문제점을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밀은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처음 접했을 때, 유럽 여러 나라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민주주의 원리가 불과 몇십 년 전 프랑스에서 거대한 물결이 되었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루이 14·15세의 전제정이 무너지고, 왕과 왕비 그리고 과학자 라부아지에 같은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다는 단편적인 지식만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이후 프랑스 혁명은 그에게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엄청난 가능성과 감동으로 다가왔고, 대의 혁명을 지지하는 젊은 투사의 열망을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1821~1822년 무렵, 밀은 아버지의 권유로 벤담의 주요 저작을 접했고, 특히 뒤몽(Dumont)의 프랑스어판 『Traité de Législation』을 열정적으로 읽었습니다. 밀은 이 독서를 "이 책을 읽은 것은 내 인생의 한 시대를 열었다. 이는 내 정신사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여러 지점 중 하나였다"(“The reading of this book was an epoch in my life; one of the turning points in my mental history.” - CHAPTER III)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밀에게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기초가 어느 정도 익숙했지만, 벤담 특유의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논증 방식은 충격에 가까운 깨달음을 안겨주었습니다.
밀은 "『Traité』의 마지막 권을 덮는 순간, 나는 완전히 달라진 존재가 되었다"(“When I laid down the last volume of the Traité, I had become a different being.” - CHAPTER III)라고까지 회고합니다. 제도와 법, 그리고 실제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논리정연하게 풀어낸 벤담의 법리(法理)와 분류 방식은 밀에게 지성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선명히 보여주었습니다. 밀은 평소 가지고 있던 여러 사회사상과 단편적 지식이 벤담 사상의 큰 틀 속에서 한데 꿰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밀은 벤담의 입법론을 접하며, 단순히 법체계의 형태만 논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인간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법]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벤담은 각종 범죄와 행위양태를 엄격히 분류하고, 법이 사회적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야 함을 설파했습니다. 이는 이전까지 막연하게 ‘도덕’, ‘자연적 정의’ 같은 추상어로만 규정되던 법과 제도의 실질적 적용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밀에게도 이러한 구체적 체계화 노력은 법률의 윤리적 기초를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힘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이제 나는 내가 이른바 초기 지적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 책들을 모두 언급한 것 같다"(“I had now, I believe, mentioned all the books which had any considerable effect on my early mental development.” - CHAPTER III)라고 말할 만큼, 벤담의 사상은 그의 개인적 성찰과 제도 개선 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줍니다.
청년 밀은 아버지의 지도 아래 로크(Locke)의 『인간 이해론』, 헬베티우스(Helvétius)의 저서, 그리고 하틀리(Hartley)의 『Observations on Man』를 차례차례 읽고 요약하여 아버지와 토론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헬베티우스]는 인간의 정신작용을 쾌락과 고통이라는 틀 안에서 분석하며 당대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하틀리]는 연합(聯合)의 법칙으로 복합적인 정신 현상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밀은 이 작업에서 얻은 바가 컸는데, 특히 하틀리의 연상 이론이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 심리 현상을 구명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1821~1822년 무렵, 밀은 존 오스틴(John Austin)과 조지 그로트(George Grote)를 비롯한 뛰어난 지식인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그로트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적극 변호하며 이후 고대 그리스사 연구로 명성을 떨쳤고, 오스틴은 벤담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법학' 분야에서 주목받았습니다. 밀은 오스틴에 대해 "그의 고결한 정신과 대화는 내게 더없이 귀중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두 사람과의 친분에서 풍부한 지적 자극을 받았습니다.
특히 오스틴은 논리나 법률 문제를 다룰 때 필요 이상으로 세밀하게 파고드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밀은 ‘실행 가능성’과 ‘현실 타협’의 균형을 배우게 됩니다. 한편, 아테네식 토론문화를 흥미로워하던 밀은 케임브리지 출신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사회·정치·철학 전반을 폭넓게 논의했고, 이로써 사상의 지평을 더욱 넓혔습니다.
1823년 밀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동인도회사(인도 관련 업무)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서기로 들어갔지만, 빠르게 업무의 핵심을 익혀 본격적인 행정 실무에 참여했고, 이후 몇십 년에 걸쳐 중요한 부서의 업무를 이끌었습니다. 밀은 이 시기를 두고 "공직에서 배운 실무적 경험이, 이론적 개혁가로서의 나에게 중요한 가치를 부여해주었다"(“I am disposed to agree with what has been surmised by others, that the opportunity which my official position gave me of learning by personal observation the necessary conditions of the practical conduct of public affairs, has been of considerable value to me as a theoretical reformer.” - CHAPTER III)라고 회고합니다.
이런 행정 현장에서의 경험은 밀에게 조직 내 협업과 타협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지는지 체득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한 사상적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일방적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현실 정치 속에서 깨닫게 해주었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일하며 제도적 개선의 복잡성을 마주했습니다. 그 결과, 밀의 사상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계승하면서도 훨씬 현실적인 정치참여 방안을 고민하는 방향으로 성숙해갔습니다.
(본 글은 [Autobiography, J. S. Mill (1873) ch. 3.]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