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저술,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리뷰를 둘러싼 청년기의 치열한 도전
(본 글은 Autobiography, J. S. Mill (1873)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20년대 초반, 아버지 제임스 밀과 경제학자 리카도의 영향을 깊이 받으며 사회경제적 이슈에 활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Traveller] 저녁 신문을 통해 신문에 기고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밀은 당시 언론이 자유롭지 않았음을 인식했으며,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시절, 신문은 대담한 급진주의가 시험되는 무대였다." (원문: “Freedom of discussion even in politics, much more in religion, was at that time far from being…”) - CHAPTER IV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젊은 밀은 리카도와 아버지가 펼쳤던 "공리주의적 경제학" 논쟁을 지켜보면서, 언론 기고를 통해 세상과 직접 소통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밀은 점차 경제학뿐 아니라 종교·사회 전반의 이슈로 관심을 확장했습니다. 특히 "카를라일 부부의 기소 사건" (원문: “The prosecutions of Richard Carlile and his wife and sister…”) - CHAPTER IV에 이르러, 종교적 비판까지 언론에서 자유롭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급진적이었던 이 입장은, 밀 스스로 "Wickliffe"라는 필명을 사용해 공개 서한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성 언론사들은 종교비판 수위가 높다며 일부 원고를 게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좌절에도 불구하고 밀은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직접 듣고 비판할 권리" (원문: “the liberty of expressing them”)를 위해 꾸준히 신문과 잡지 기고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지식인 사회는 에든버러 리뷰와 쿼털리 리뷰라는 두 거대 정기간행물을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둘 다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했지만, 보수와 중도노선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이 밀과 급진주의자들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벤담은 자유주의·급진주의 진영의 입장을 대변할 새로운 잡지인 웨스트민스터 리뷰 창간을 결심했습니다. 밀은 아버지 제임스 밀과 함께 원고를 쓰는 데 참여했지만, 창간을 주도한 이는 벤담과 존 바우링이었습니다. 밀은 창간 직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등장은 급진주의가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징이었다." (원문: “a Radical organ to make head against the Edinburgh and Quarterly…”) - CHAPTER IV.
밀에게 웨스트민스터 리뷰는 단지 급진 사상을 표출하는 장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제임스 밀이 기고한 에든버러 리뷰 비판 논문을 정독하며, 시의적 이슈를 어떻게 분석적으로 풀어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제임스 밀은 에든버러 리뷰가 "귀족정치와 온건야당의 사이에서 목적 없이 흔들린다." (원문: “the main characteristic… what he termed ‘seesaw’”) - CHAPTER IV고 혹독하게 평했습니다. 이 글은 출간과 함께 큰 반향을 일으키며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편집자 존 바우링과의 편집 방향 차이, 재정 문제 등으로 긴장이 높아졌고, 결국 밀은 한동안 원고료 없이 집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밀은 잡지 기고뿐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집단 스터디’를 꾸렸습니다. 그는 아침 시간을 활용해 리카도와 아버지의 저서, 그리고 각종 논문을 모아 정치경제학을 집중적으로 토론했습니다. 밀은 "같은 주제를 놓고 몇 주씩 끈질기게 토론을 반복했다." (원문: “We repeatedly kept up the discussion of some one point for several weeks…”) - CHAPTER IV라고 회상합니다. 토론은 곧 논리학으로 확장되어, 그들은 알드리치, 호브스, 휘틀리 등의 저작을 깊이 있게 해부했습니다. 이 토론 모임은 밀 스스로를 "독창적 사상가로 일어서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원문: “I have always dated from these conversations my own real inauguration as an original and independent thinker.”) - CHAPTER IV고 말할 만큼 결정적이었습니다.
밀은 같은 시기 연설 능력을 키우기 위해 협동조합(오언주의) 사회라는 공개 토론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여기서 리카도의 인구론이나 급진적 경제정책 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때로는 수백 명의 청중 앞에 서는 만큼, 개인의 연설 능력이 절실했습니다. 밀은 이 경험을 통해 "대중 앞에서 주장할 수 있는 논지를 단단히 다듬고, 문장을 매끄럽게 다루는 법을 배웠다." (원문: “I greatly increased my power of effective writing…”) - CHAPTER IV고 평가했습니다. 덕분에 웨스트민스터 리뷰에서 글을 쓸 때도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기법이 한층 정교해졌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리뷰는 창간 초기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압박이 커졌습니다. 더구나 편집 방향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심화하면서, 밀과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핵심 기고자 상당수가 잡지를 떠나게 됩니다. 이때 밀은 "결국 재정 문제와 편집 권한 문제의 충돌로 나는 원고를 쓰는 것을 그만두었다." (원문: “Thus ended my connexion with the original Westminster.”) - CHAPTER IV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결별은 오히려 밀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프랑스 혁명사나 자유주의 이슈를 정리해볼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자료 수집을 Carlyle에게 제공했고, 이는 그의 저술에 큰 보탬이 되었다." (원문: “my collections afterwards were very useful to Carlyle for a similar purpose.”) - CHAPTER IV라고 언급합니다. 이는 밀 특유의 지적 네트워크와 집요한 자료 수집이 빛을 발한 일화입니다.
(본 글은 Autobiography, J. S. Mill (1873)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