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간은 기계인가? 인간은 자유롭게 결정하는 주체인가?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아니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인가

(본 글은 인문학 전문서적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I. 인간, 기계라는 주장

- 인간이 정말 기계와 유사하다는 파격적 시선의 시작


마크 트웨인은 『What is Man?』(1906)에서 상당히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을 창조하는 주체인가, 아니면 환경이 만들어낸 기계일 뿐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원문에서는 두 인물이 대화를 나누는데, 한 사람(Old Man: O.M.)은 인간이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Young Man: Y.M.)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이야기 초반, O.M.은 증기 기관(steam-engine)에 비유하여 인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려 합니다. 철광석이 여러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도 높은 엔진을 만들 수 있듯이, 인간도 태생적 ‘재료’와 후천적 ‘교육’에 의해 빚어진 하나의 기계적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돌로 만든 엔진과 금속으로 만든 엔진의 차이가 곧 인간 간 능력과 성취의 차이를 보여준다고도 말합니다. 한편 Y.M.은 “그러면 인간이 선한 일, 혹은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정한 가치와 공로는 어디로 간 것인가?”라며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정말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존재일까요? 저자는 이것이 도발적 명제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했던 자유의지와 도덕적 공로 개념을 뒤흔드는 화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인간은 행동의 기원이라곤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Man originates nothing.)”(Chapter I)라는 문장이 자주 인용될 정도로, 이 작품은 시종일관 ‘인간은 어디까지나 외부적 영향에 좌우된다’라는 논점을 유지합니다.


II. 금속 엔진과 돌 엔진의 비유

- 재료와 가공 과정이 빚어낸 ‘엔진’이 곧 인간이라는 도발적 은유


원문에서 O.M.은 돌로 만든 엔진과 철, 강철, 황동 등으로 구성된 엔진의 차이를 강조합니다(Chapter I). 돌 엔진은 거의 아무런 기능도 못하지만, 정제된 금속 엔진은 훨씬 유용하고 강력한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타고난 자질과 후천적 교육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돌 엔진이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제한적인 성능을 벗어나지 못하듯, 어떤 인간은 환경과 교육적 자원이 충분치 않아 역량을 펼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O.M.은 “모든 사물에는 그 한계가 있다. 철광석은 결코 금이 될 수 없다(Everything has its limit—iron ore cannot be educated into gold.)”(Chapter I)라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선천적 ‘재질’과 후천적 ‘가공’(교육과 환경)이 하나로 어우러져 현재의 인격, 능력, 행동 방식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 반발하는 이유는, 이 관점대로라면 사람에게 ‘개인적 공적(merit)’이란 거의 존재할 여지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III. 개인의 의지와 환경

-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인가, 아니면 밖에서 주어지는 것인가?


Y.M.은 인간이 기계라면, 자신이 생각해내는 모든 의견과 신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Chapter I~II). 예를 들어 “나는 당신의 이론이 틀렸다고 생각한다”라는 생각조차도 외부에서 들어온 재료를 조합한 결과물이라는 말이 말이 되느냐는 의문입니다. 이에 O.M.은 “당신이 믿는 생각, 느끼는 감정은 모두 전에 읽었던 수많은 책, 들었던 수많은 대화, 그리고 전승된 조상들의 마음과 뇌에서 흘러들어온 것의 조합이다(All his thoughts, all his impulses, come from the outside.)”(Chapter I)라고 답합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할 때, 스스로 “내가 생각하기에…”라고 표현하곤 하지만, 사실은 과거에 축적된 교육과 경험, 문화, 환경적 영향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산출된 결과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이 예외 없이 외부의 영향을 받아 행동한다면, 과연 우리의 자유의지나 주체성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IV. 자기 승인(Self-approval)의 법칙

- 모든 선택과 행동은 결국 자기만족을 향해 흐른다는 급진적 주장


이 작품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지점 중 하나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내적 편안함, 즉 양심의 승인 혹은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는 주장입니다. O.M.은 “우리는 영적 평온(spiritual comfort), 곧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 위해서만 무언가를 한다(From his cradle to his grave a man never does a single thing… but to secure peace of mind.)”(Chapter II)라고까지 말합니다.

즉, 인간은 겉보기에 이타적이거나 헌신적인 행동을 해도, 그 이면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라든지 “이 행위를 통해 자아를 승인할 수 있다”는 동기가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거리에서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것도, 안 돕고 지나치면 죄책감으로 괴로워질 자신을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식의 설명입니다. 원문에서는 “그는 25센트를 주고도 걸어서 집에 돌아오는 수고쯤은 충분히 보상받는다(It should make Wall Street ashamed of itself.)”(Chapter I)라고 농담조로 표현합니다. 즉, 자신의 죄책감이나 불편을 25센트로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Y.M.은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선행이 결국 이기적인 것에 불과하다니, 말이 되는가?”라며 거세게 반박합니다. 그러나 O.M.은 ‘이기성’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그것이 곧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자연스러운 기계 작동 원리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V. 선행과 이기심의 경계

- ‘정말 베푸는 것’과 ‘결국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책에서 등장하는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한 남성이 눈보라 치는 밤에 노파에게 25센트를 주고, 정작 자신은 매서운 추위 속에서 걸어간 사례입니다(Chapter II). 얼핏 보면 자기를 희생한 이타주의의 정수 같지만, 실제로는 “도와주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괴로워 잠을 못 잘 것 같아서”였다는 설명입니다. Y.M.이 “그것이 정말 순수한 희생이 아니면 무엇이냐!”라고 하지만, O.M.은 “그는 자기 속의 칼날 같은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 그 동전을 쓴 것일 뿐이다”라고 정리합니다.

마치 냉소처럼 들리지만, O.M.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 평안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명제와도 상통합니다. 또한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삶을 살고 싶다”라는 내면적 동기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를 위한 헌신을 택한다는 식으로 설명됩니다. “그는 이 선택을 통해서만 자기 양심의 불편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He will secure the largest share possible of that, at all costs, all sacrifices.)”(Chapter I~II)


VI. 선악과 양심의 문제

- 교육, 환경, 후회가 보여주는 인간 의식의 복잡성


원문 중반부에 소개되는 ‘믿음’을 둘러싼 에피소드(Chapter II)는 O.M.의 인간관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한 ‘불신자(Infidel)’가 임종 직전의 소년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해버리는 바람에, 아이는 위안을 잃고 고통스럽게 죽습니다. 그 뒤 불신자는 극심한 자책감을 느끼고, 결국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서서 또 다른 곳에서 선교 활동을 펼칩니다. 그런데 이교도 문화권에 가서도 상대의 믿음을 부정하고 자신의 종교를 전하는 바람에, 비슷한 상황을 재현해버리고 또다시 후회에 시달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양심 혹은 윤리감도 결국은 철저히 ‘외부 환경과 교육’으로부터 형성되었으며, 자기만족과 자기 불편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는 점입니다. O.M.은 “사람의 양심은 날때부터 완전무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훈련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A conscience can be trained to shun evil and prefer good.)”(Chapter II)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자신의 양심에만 의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을까요? 원문에서는 예리한 질문을 던집니다. “강도나 살인을 선행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은 이에게도, 그것이 ‘양심’일 수 있지 않은가?”라는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그런 의미에서 ‘양심이 언제나 정답을 알려주는 내면의 신적 목소리’라는 통념을 뒤흔듭니다.


VII. 인간이란 무엇인가?

- 자유와 의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불편한 결론


결국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기계다’라는 낯선 명제를 통해, 우리의 사상과 행동이 스스로 발명해낸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합니다. 그는 원문 후반부에서 “하나의 기계로서 인간을 동작하게 하는 것은, 오직 자기 영혼(정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충동 하나뿐이다(…the imperious necessity of securing his own approval.)”(Chapter II)라고 못 박습니다.

이 결론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선행과 이기심을 구분 짓던 도덕론에 큰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고, 애국하고, 사랑하고, 때로는 자기 희생적 결정을 하는 것마저도 결국은 내 ‘영혼의 편안함’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양심과 무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기계적 작동’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한편으로 이 글은 ‘그래서 인간은 결국 이기적이고 절망적인 존재다’라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마크 트웨인의 논지는 인간의 본성을 냉정히 살피고, 그렇게 기계적으로 기능하는 속성 덕에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일들이 더욱 지속되고 전승될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더욱이 양심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어떤 영향과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인간 기계가 내뿜는 움직임도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남깁니다.

결국 “What is Man?”이라는 물음에 대한 트웨인의 답변은 불편하면서도 파격적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삶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통찰을 제시합니다. “기계로서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전부인지, 혹은 우리의 기계적 측면이 인간적 따스함과 공감을 높이는 통로가 될지, 독자 여러분의 추가적인 탐구를 기대합니다.


(본 글은 [What is man? and other essays, Mark Twain (1906)]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