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와 본성, 그 미묘한 경계를 되짚어보다
(본 글은 인문학 전문서적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에세이 「What Is Man?」(1906) 중 일부 대목에서는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거나 주도한다기보다, [어떤 ‘기계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존재]라는 주장이 펼쳐집니다. 겉보기에는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하며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내면에 ‘자동으로 작동하는 장치’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영혼의 자유의지, 혹은 근대 철학에서 강조해온 이성적 판단력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트웨인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관점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의 어떤 마스터(master)가 자동으로 사고를 펼치고 멈추는] 것”이라는 선언은 꽤나 급진적으로 들립니다. 이를테면 “When it chooses to work, there is no way to keep it still for an instant.”- 『What is man? and other essays, Mark Twain (1906), ch. V』와 같은 말로, 마음이 한 번 생각을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는 지적이 대표적입니다.
마크 트웨인이 제시하는 예시에 따르면, 인간은 자려고 누웠다가도 머릿속이 일종의 ‘자동기어’로 계속 돌아가는 경험을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말자”라고 명령해도 소용이 없고, “내일 꼭 이 주제를 떠올리자” 해도 정작 깨어났을 때는 전혀 다른 생각이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결국,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신은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특히 “밤새 체스 게임을 머릿속에서 계속 두고, 일주일 내내 익살맞은 노래 가락이 떠나지 않으며, 아무리 중단을 애걸해도 생각이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는 일화는 여러 사람이 공감할 만한 사례입니다. 트웨인은 이를 두고, [인간의 정신이란 사람이 원하는 대로 멈추거나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동하는 무언가]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You cannot keep your mind from wandering, if it wants to; it is master, not you.” - ch. V)
우리는 종종 꿈속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접하지만, 그 전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펼쳐져 “이게 정말 꿈인가?” 하며 헷갈리곤 합니다. 트웨인에 따르면, [꿈을 만드는 정신과 깨어 있을 때 의식하는 정신은 사실상 같은 ‘기계’]입니다. 예컨대 꿈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슬픔, 공포, 심지어 구체적인 계획이나 말주변까지 실제 생활과 비슷하거나 때로는 더 치밀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떠오르는 복잡하고 정교한 꿈의 서사” 역시 우리 정신의 자발적 활동입니다. 트웨인은 이 점을 들어, “If the dreaming mind can carry on these vivid dramas all by itself, why cannot it do the same when awake?”라고 묻습니다. - ch. V. 꿈이나 현실이나, 결국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장치’로 굴러가는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독자 입장에서 가장 난감한 지점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선과 악 중 무엇이 옳은지 판단은 하되, 실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자 훈련된 ‘마스터’가 결정한다”라는 트웨인의 주장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듯합니다.
트웨인은 예시로 [타고난 겁쟁이가 골리앗과 맞서 싸울 것인가, 다윗처럼 싸울 것인가]를 묻습니다. 겁이 많은 이는 “싸우는 것이 옳다”는 걸 인식하더라도, [내면의 기질(temperament)이 그에게 싸움을 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옳고 그름을 아는 인식 자체는 가능하지만, 최종 선택을 이끄는 힘은 또 다른 작동 원리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트웨인은 이를 두고, “Why claim that he has Free Will when the plain facts show that he hasn’t?” - ch. V 라고 단언합니다.
원문 중간에 언급된 ‘백만장자와 거지’ 비유나, [우리가 ‘누군가의 선행’을 평가할 때 자기 잣대를 적용하고, 또 다른 사람이 자기 잣대를 따르길 강요한다는 내용]은 흥미롭습니다. 우리 모두 ‘기부’를 칭송하면서도, 그 기부 금액이 스스로 설정한 기준보다 적으면 “왜 더 많은 사람을 돕지 않지?”라고 타인을 비난하곤 합니다. 정작 타인에게 내민 기준대로 [우리가 똑같이 실천하는지]는 의문이지요.
트웨인은 이런 모습을 두고, "인간은 항상 다른 사람의 기준을 살펴볼 때 아래를 내려다보며, 결코 올려다보며 살펴봐야 할 기준은 찾지 않는다." “The human being always looks down when he is examining another person’s standard; he never find one that he has to examine by looking up.” - ch. V 라고 꼬집습니다. 즉,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잣대를 최우선으로 삼으며],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타인을 일방적으로 평가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도덕’도 어딘가에서 후천적으로 주입된 습관이자 자기만족의 결과물]임을 은근히 암시합니다.
트웨인의 글에는 인간을 일종의 [다중 구조]로 가정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하나의 ‘나’처럼 보이나, 실상은 [마음(지적 기능), 기질, 감정, 환경 등에 따라 여러 기제가 움직이는 복합체]라는 거지요. 우리가 “내 몸(my body)”이라고 부를 때, 이미 “my”라는 말 안에 [육체를 소유물로 여기는 별도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남습니다. 트웨인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다만 “We cannot definitely find the master, but we see that all parts act as a machine.”- ch. V 라는 식으로 결론 지어 버립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주체조차도 [유전적 기질과 환경적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글 후반부에서 트웨인은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가 아니라, 결국 ‘자기 영혼(혹은 자의식)을 만족시키는 상징’]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새 모자가 됐든 거액의 돈이 됐든, “남들에게 칭찬받지 못하면 금세 무의미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내면의 만족, 곧 ‘마음’이 원하는 의미]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심지어 [인간이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분된다고 자신하는 ‘도덕적 의식(Moral Sense)’마저도, 사실은 더 큰 자기만족을 위한 장치 중 하나]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착한 행동과 나쁜 행동 간 차이를 아는 건 분명 인간만의 특징이지만, 착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이면에는 결국 [자기 자신의 내면적 보상]을 노리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죠.
결국 트웨인은 [인간의 모든 선택이나 욕망은 자기 내부의 ‘주인’이 원하는 만족, 즉 영적 욕구(spiritual appetite)를 채우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In the end, man is under the dominion of his Master Passion—the hunger for self-approval.” - ch. V 라는 결론처럼, 그가 바라보는 인간관은 상당히 냉소적인 동시에 통찰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혹은 세상의 모든 ‘자부심’과 ‘영광’을 앗아갈까? 그 답변은 의외로 명쾌합니다. 인간이란 [어떠한 조건에서도 행복함을 찾아내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기막힌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멈추지 않고 사고하는 ‘기계적 존재’임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 글은 [What is man? and other essays, Mark Twain (1906)]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