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신학과 근대 주체성이 만나는 교차점 살펴보기
(본 글은 인문학 전문학술 논문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시를 건설했다. 한 가지 사랑은 자기 사랑으로 신을 멸시하는 세속 제국을 만들고, 다른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교 교회를 만든다.” (『하나님의 도성』, 14.28)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사랑이라는 정서를 통해 중세 기독교의 세계관을 정립했습니다. 그는 “이 사랑의 힘이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원문, p.117)라고도 언급하며, 감정을 인간 삶의 핵심 요소로 바라봤습니다. 반면 데카르트는 “사랑은 정기의 운동에 의해 야기된 영혼의 동요로 … 영혼에게 유익해 보이는 대상과 결합하도록 자극한다.” (『정념론』, p.83 [79항])라고 정의하여, 주체 내부에서 사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본 논문은 이 두 사상가가 ‘사랑’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분석해, 중세적 세계관과 근대적 합리론 사이의 정신사적 전환을 비교‧조명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중세 신학의 틀 속에서 ‘존재론적 사랑의 위계’를 정립했습니다면, 데카르트는 이분법적 육체-영혼 관점에서 ‘정념(passion)’과 자유의지를 결합해 사랑을 설명합니다.
“나는 아카데미파의 이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네가 틀렸다면 어떻게 할 테냐?’고 그들은 묻지만, 내가 틀렸다고 하더라도 나는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도성』, 11.26)
이는 흔히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방법서설』, p.40)와 비교됩니다. 둘 다 자기 인식의 확실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문장은 신앙적 확신과 연결되어 있고, 데카르트에게는 주체 중심적 합리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통한 ‘내면으로의 회귀’를 강조하며 신과의 관계 안에서 자아를 이해했지만(원문, p.119), 데카르트는 오로지 ‘생각하는 주체’를 근대 철학의 제1원리로 설정했습니다. 논문은 이런 공통점(자아 인식의 확실성)과 차이점(근본 지향점)을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의 핵심 비교 지점으로 꼽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우리의 동감을 표시할 때는 그것을 욕망이라 하고, 원하는 것을 즐김으로써 우리의 동감을 표시할 때는 기쁨이라고 한다. …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에 반대할 때 의지의 행동은 공포로 나타나고, 원치 않는 일이 실제로 생길 때 슬픔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도성』, 14.6)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토아주의가 말한 ‘무정념(apatheia)’ 대신, 기독교 신앙을 통해 ‘바른 정서’를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있을 수 있어도 유익을 주지 못하므로, 믿음 자체도 사랑이 있어야 유익하게 된다.” (『삼위일체론』, 15.18.32)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적 덕목인 ‘사랑’을 정서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죄론’(original sin)에 근거해, 인간의 의지가 신의 도움 없이는 온전히 발현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즉, 의지 자체는 자유롭지만 타락으로 약해져 있어, “오만하고 호기심이 많고 유약할 때에 딴 삶에 사로잡히며, 월등한 삶에 비한다면 이런 삶은 죽음이나 마찬가지” (『자유의지론』, 2.53)라고 경고했습니다.
중세적 사유 전통과 결별하듯 보이는 데카르트가 마지막 저작인 『정념론』(1649)에서 감정 문제를 다룬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는 “정념을 영혼의 지각이나 감정 또는 동요라고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고, 또한 정념은 영혼에 특별히 연관되어 있으며 정기의 어떤 운동에 의해 야기된다.” (『정념론』, p.42 [27항])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송과선(松果腺)’이 육체(연장된 실체)와 정신(사유하는 실체)을 연결하는 매개 기제로 작동합니다. 몸에서 발생하는 동물 정기(animal spirit)가 이 송과선을 통해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만, “영혼은 그 작은 샘에서 다양한 운동이 일어나는 정도로 다양한 인상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본성을 지닌다.” (『정념론』, p.48 [34항])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정념을 통제하는 핵심은 자유의지입니다. 데카르트는 “보통 사랑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박애(bienveillance)라 불리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육욕(concupiscence)이라 불리는 것이다. … 그러나 내게 이 구분은 단지 사랑의 효력에 관련될 뿐, 사랑의 본질에는 관련되지 않아 보인다.” (『정념론』, p.84-85 [81항])라고 말하며, 궁극적으로는 ‘의지’가 정념을 올바르게 관리할 수 있다는 낙관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사랑할 것이 네 가지다. 첫째, 우리보다 높은 것, 둘째, 우리 자신, 셋째, 우리와 동등한 것, 넷째, 우리보다 낮은 것이다.” (『기독교 교육론』, 1.23)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은 존재론적 질서 속에서 신과 피조물의 위계를 분명히 세우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론적인 ‘사랑의 질서’(ordo amoris)는 인간의 올바른 사랑은 신을 향유(frui)하고, 인간 이외의 사물들을 이용(uti)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기초한다.” (원문, p.115-116)
따라서 신은 그 자체로 향유의 대상이고, 인간 및 다른 피조물은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사랑의 맥락 안에서만 적절히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를 벗어난다면 탐심(cupiditas)에 빠지게 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대조 개념을 카리타스(caritas)라 불렀습니다. 그는 “만일 우리가 영원불변한 신이 아닌 것들을 목적으로 삼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자기 안에 갇힌 잘못된 사랑이 된다.” (원문, p.128)라고 지적합니다.
데카르트도 사랑이란 ‘영혼이 결합하고자 하는 의지의 운동’이라 보고, 대상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보다 낮은 대상에는 애정, 동등한 대상에는 우정, 더 높은 대상에는 헌신” (『정념론』, p.86 [83항])이라고 구분합니다. 다만 이때 “더 높은 대상”이 반드시 신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는 박애심을 갖게 되고, 대상과 의지가 결합하자마자 그 대상에 합당하다고 믿는 일들을 의지가 실행하게 된다.” (『정념론』, p.84 [81항], 요약)고 보며, 어떤 경우에는 국가나 특정 인물을 위해 “확실한 죽음에 노출된 이들”의 사례를 통해 헌신이 가능하다고도 말합니다. (원문, p.130)
결과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신 중심의 위계’와 달리, 데카르트는 ‘주체와 자유의지’의 적극적 판단에 따라 사랑을 정립합니다. 논문은 이 대목을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가 “신에게서 독립한 주체로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합니다. (원문, p.116, 131)
두 사상가는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을 진지하게 다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 중심의 존재론적 위계에서 ‘올바른 사랑’을 말했고, 데카르트는 주체 중심의 정념론에서 ‘이성이 정념을 통제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저자는 논문에서 “두 사람이 모두 인간 감정의 중요성을 인지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학적 틀에서 이를 분석했다면, 데카르트는 인간 주체의 자율적 의지와 이성적 통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개했다.” (원문, p.132)고 평가합니다. 사랑이라는 정념을 중심에 놓고 봐도, 중세와 근대의 뚜렷한 경계선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셈입니다.
이 논문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이면서도 심오한 주제를 통해, 중세 철학의 거장 아우구스티누스와 근대 합리론의 선구자 데카르트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위계와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상반된 맥락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또한 ‘정념’과 ‘사랑의 질서’가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를 어떻게 달리 포착하고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다루어, 독자 스스로 감정과 의지의 문제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중세 신학과 근대철학에 대한 입문서로도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한 번쯤 직접 원문을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본 글은 [임형권, "데카르트의 사랑의 정념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질서" <철학·사상·문화> pp.115-136 (2024), KCI 등재]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저자와 출판연도는 정확히 기재했으며,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po/search/poArtiTextSear.kc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