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어린왕자-가스라이팅에 대항하기 어려운 이유

여우와 장미, 피그말리온 이야기의 불편한 진실

어린 왕자는 장미들을 다시 보러 갔습니다.
"당신은 내 장미와 전혀 달라요"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도 당신을 길들이지 않았고 당신은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사랑스럽지만, 비어 있어요" 그는 계속했습니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죽지는 않을 거거든요. 분명 다른 사람들은 내 장미가 당신과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하겠죠. '내 것'인 장미 말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장미가 다른 수백 송이의 장미보다 더 중요해요. 왜냐하면 내가 물을 준 것은 그 장미이기 때문이죠. 내가 유리 아래에 보호했던 것은 바로 그 장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애벌레를 죽인 것은 그 장미 때문입니다. 그 장미가 투덜거릴 때, 자랑할 때, 심지어 때때로 그 장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내가 귀기울여 들었던 것은 바로 그 장미이기 때문이죠. 왜 그렇게 했냐 묻는다면 그녀는 "나의" 장미이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우리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어린왕자>에서 이 대목을 읽을 때 왕자의 헌신, 봉사와 깊은 사랑에 감동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왜 그렇게까지 희생하며 상대를 보살펴야 하는건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동기부여된 것인지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장미 입장에서는 누군가 다가오고 관계 맺으려 하는 게 싫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이란 이름으로 집착이 되고 소유와 간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심리학 용어 중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연인, 부부, 부모-자식, 친구, 선생-학생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의도적인 심리 조작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일본의 야스토미 아유미 교수는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출처: Yes24



왕자는 여우에게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장미 한 송이가 있었는데… 내 생각에 그 꽃은 나를 길들이고 있었어….”
이 경우 길들인 쪽은 장미이며, 길들여진 쪽은 왕자이다. 양자의 관계는 명백히 비대칭적이다. 그런데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라 설명했다. ‘길들인다=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본래 비대칭적인 것을 대칭적으로 보여주는 기만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비대칭성의 은폐는 모럴 해러스먼트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학대자/피해자’라는 비대칭성을 은폐하고 ‘우리가 서로’처럼 보이는 것이 학대자가 가진 음모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 야스토미 아유미,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


정말 여우가 왕자를 기만하고 장미가 왕자를 착취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러한 생각은 언어의 뉘앙스 차이에서 비롯한 오해이며, 여우와 생텍쥐베리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한 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어린이의 동심을 사랑한 생텍쥐베리가 그런 폭력성을 의도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친밀감과 가스라이팅은 처음에 분간하기 매우 어려울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어린왕자>의 경우 프랑스어와 영어, 한국어, 일본어 사이의 뉘앙스 차이까지 엮여 있다. 나는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모르지만, 다수 문헌에 따르면 'tame', 혹은 '길들이다'라는 표현은 오역이거나 최소한 불완전한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우와의 대화에서 사용된 프랑스어 어휘의 원문은 "apprivoiser"([아프리부아제]로 읽는다)로서, 영어 단어 "tame"으로는 완전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는 미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본질과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번역가의 탓이라기보다는 언어라는 것 자체가 가지는 매우 복잡한 속성 탓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한국어 모국어 화자인 나부터도, '길들이다'라는 말이 일방적, 위계적인 것인지 쌍방적, 평등한 것인지 혹은 둘 다 뜻할 수 있는 것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어떻게 보면 그 해석은 독자에게 맡겨진 것이고 텍스트만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동을 대상화, 물질화하고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세계관에서 동일한 언어가 저자의 의도와 달리 재해석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단순히 언어나 어휘의 문제라기보다는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다.

"apprivoiser"는 길들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알게 되거나 친숙해지거나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는 다른 존재와 유대감이나 관계를 맺는 과정을 의미하며, 이는 이야기의 핵심 주제다. 어린 왕자와 여우 사이의 'apprivoiser'의 개념을 논의할 때, 단순히 여우를 길들이거나(tame), 가축화하는(domesticate) 것이 아니라 독특한 유대감이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린 왕자와 여우가 서로의 독특함을 이해하고 인정함으로써 깊고 지속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은 '길들이기'보다는 'apprivoiser'라는 개념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모든 언어에 일대일 대응을 할 수 없는 이상 작품 해석 과정에는 반드시 난해한 부분이 있다. 아무튼 독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길들이다', 혹은 'tame'이라는 번역이 프랑스어 원어인 '아프리부아제'의 풍부하고 복잡한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유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친밀함을 빙자해 착취당하는 기만적이고 불평등한 관계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이 타인에게 집착, 간섭, 소유욕으로 느껴질 수 있고, 나의 헌신이 사실은 착취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큰 사랑을 주고받을 때일수록 일부러라도 깊은 성찰을 해봐야 한다.




https://www.wikiart.org/en/jean-leon-gerome/pygmalion-and-galatea 프랑스의 유명 화가 장 레옹 제롬의 1890년 작품



집착적인 사랑의 유명한 일화로는 피그말리온의 신화가 있다. 자기가 만든 조각상 갈라테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이 생명을 불어넣어줬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관계는 신화처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를 객체나 대상, 소유물이 아닌 동등한 주체로 대접해야 한다. 그러한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조각상에 생명이 생긴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가 조각상일 때는 그저 아름다움을 예찬하면 될 일이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상대의 의지가 내 욕망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조지 버나드 쇼는 희곡 <피그말리온> 신화의 해피엔딩을 뒤집어 버리며 또 하나의 명작을 내놓는다. 부유한 음성학자 남자 히긴스가 하층민 꽃 파는 소녀 일라이자를 발음과 어투를 교정하고 상류사회의 사교계에 데뷔하게 만든다는 내용, 아마 들어 봤을 것이다. 희곡에서 일라이자는 (그리스 신화와는 달리) 자신만의 의지를 바탕으로 히긴스와의 로맨스나 보호를 거부하고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간다. 피그말리온의 소유물에 대한 사랑의 방식은, 그 객체에 대해서도 주체에 대해서도 관계에 있어서도 결코 좋은 결말을 낳지 못한다.

이러한 교훈은 동물과의 관게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 말에서도 애완견이라는 표현이 반려견이라는 표현으로 변화하고 있다. 영어에서도 Pet이 아니라 Companion animal 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고 한다. 누군가는 '애완동물'을 보고 참 살기도 편하고 팔자 좋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럴까? 꼭 학대받는 동물이 아니더라도 객체나 대상화의 문제를 빼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동물해방론자들 사이에서도 반려동물을 해방시켜야 할 대상인지 여부는 의외로 첨예한 논란이 벌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동물권 단체인 PETA의 창립자 잉그리드 뉴커크 역시 아래와 같이 말한 적 있다. 객체와 대상에 불과했던 애완동물이 점차 권리와 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반려동물로 호명되는 현상은 점점 일방적 관계가 아닌 쌍방적 관계로 의미가 전환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PETA는 우리와 집을 공유하는 반려동물을 매우 사랑하지만, '동물 사육' 제도, 즉 동물을 사육하고 'Pet'으로 간주하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동물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고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개를 조작하거나 번식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장난감을 원한다면 무생물 장난감을 사야 합니다." - 잉그리드 뉴커크, PETA의 공동창립자

어린왕자가 비행사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하는 장면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린왕자 와 어린양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양과 어린 왕자는 순수하고 순진하고, 이용당하기 쉬운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양은 구약 성경에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인데, 아래와 같이 언급된다. 실제로도 자기방어능력과 방향감각이 없으며 겁이 많아서 반드시 양치기를 필요로 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래 성경구절에서와 같이, 어린 양은 반드시 그를 이끌어 줄 주체가 필요하다고 묘사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 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 간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 하나 불러 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양떼를 불러 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 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 간다.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 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 요한복음 10장 1-5절, 신약성경, 공동번역


하지만 양들에게 양치기가 필요하다는 식의 설명에는 양을 이용해 양털과 고기를 취하려는 일방적인 관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자연선택에 따라 잘 살던 동식물을 데려와서 인간이 없으면 너희는 멸종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건 가스라이팅의 심리와 닮아 있지 않은가. 예수님이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걱정해서 이끌어 주려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러한 구절은 많은 사이비 종교에서 악용되어 왔다. JMS 성폭행 사건, 인민사원 집단자살 사건, 옴진리교의 테러 사건 등이 벌어지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신도들이 자기 자신을 어린 양으로 생각하고 교주에게 모든 판단을 맡기고 의존하기 때문이다. 교주들이 금전, 노동, 성을 착취해도 모두 큰 뜻이 있을 거라고 믿고 만다.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조언하고 설득하려고 해도 '양들은 낯선 사람을 따라 가지 않는다'라고 되뇌일 뿐이다. 그래서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기'라는 개념은 위험하다. 어린 양을 길들이듯이 어린 왕자는 길들여진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단순히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는 관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은 그의 대표작 <포피리아의 연인>이라는 시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아래와 같이 경고했다. 살인자의 기괴한 독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의 문제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녀는 일어나, 자기 몸에서 빗물이 흐르는 외투와 숄을 벗고, 더럽혀진 장갑을 벗어 옆에 놓고, 모자끈을
풀고 자신의 젖은 머리를 늘어뜨렸다.
그녀는 내 팔을 잡아 자기 허리에 대고, 부드러운 흰 어깨가 옷을 벗게 한 뒤, 노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전부 뒤로 넘겼다.
그 순간 그녀는 내 것이었다. 완벽하게 순수하고 선한 내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전부 길고 노란 하나의 줄로 만들어 상처를 입혔다, 세 번에 걸쳐 그녀의 작은 목구멍을 칭칭 감아서. 그렇게 목을 졸라 죽였다.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나는 주의 깊게 그녀의 눈꺼풀을 열었다. 파란 눈이 다시 티 없이 웃었다. 그리고 나는 머리카락 옆의 목 부근을 느슨하게 하였다. 나의 불타는 키스에 그녀의 뺨이 다시 한 번 밝게 붉어졌다.
-로버트 브라우닝, <포피리아의 연인> 중


이 시에 묘사된 '그녀'는 뭘 의미하는 걸까?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지만, 가족, 꿈, 예술, 혹은 어떠한 가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을 발견하면 처음에는 행복해하지만 어느새 불안을 느끼고 그걸 박제하고 소유하려고 발악한다. 하지만 생텍쥐패리의 말처럼,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욕망을 채우려 해도 공허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인간들은 그 대상을 어떻게든지 잘라내고 가공하고 심지어 죽여서라도 내 옆에 묶어두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상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정복하고 가졌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왜 그토록 어리석은 걸까. 그러면서도 그 남자는 '내가 포피리아를 드디어 길들였어'라고 되뇌일 지도 모른다. 누군가 당신에게 깊이 헌신하고 희생하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길 바란다. 상대는 자기의 자유로운 의사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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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감미로운 멜로디와 동시에 섬뜩한 가사를 가진 명곡을 소개하며 마치고자 한다.(원래 가스라이팅과 집착은 처음에 감미로운 목소리로 접근한다.) Sting이 활동했던 밴드 'The Police'의 노래 <Every breath you take>다. 이 노래는 2010년 잡지 롤링 스톤에서 역대 최고의 노래 500개 중 68위로 선정되기도 했고 유튜브 조회수는 10억을 달성했다. 멤버 스팅이 이혼을 앞두고 심리적 불안을 경험하면서 아래와 같이 병적인 가사를 덧붙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노래의 화자는 '당신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지만, 사실 사랑은 소유의 관계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소유 양식이 아닌 존재 양식의 관점에서, 평등한 관계의 실존적인 사랑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다음 글에서는 사랑, 우정, 부모-자식 간의 관계, 공부법 등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소유 관념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실존적이고 주체적, 경험적인 존재 양식의 대안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 멜로디를 처음 들어본 사람은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MOGaugKpzs

Every breath you take / Every move you make / Every bond you break / Every step you take / I'll be watching you.
당신이 내쉬는 숨소리마다 당신이 만드는 몸짓마다 당신이 깨뜨린 약속마다 당신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난 지켜볼 거에요
Every smile you fake / Every claim you stake / I'll be watching you
당신이 짓는 거짓된 미소마다
당신이 내비치는 의견마다
난 지켜볼 거에요
Since you've gone I been lost without a trace / I dream at night I can only see your face / I look around but it's you I can't replace
당신이 떠나고 난 길을 잃어버렸어요 난 꿈을 꾸죠 오직 당신 얼굴만 그려요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당신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어요
Oh can't you see / You belong to me
당신은 모르겠나요 당신은 나의 것 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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