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는 신 포도를 두고 어디로 떠났을까: 두 갈래 길

우리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여서 두 길을 모두 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오래도록 서서 한 길이 덤불 사이로 굽어지는 곳까지
멀리, 저 멀리까지 내다보았습니다.
(중략)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하겠죠.
까마득한 예전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로 나아갔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중.



나는 <여우와 신 포도>가 가장 지독하게 악용되는 동화라고 생각한다. 이솝 우화의 하나로, 여우가 높이 매달린, 혹은 울타리 때문에 닿을 수 없는, 포도를 먹지 못하고 돌아서며 '신 포도'일 거라고 투덜대는 내용이다. 이 동화의 교훈이 무엇인지는 좀 불명확하다. 힘들어도 끝까지 도전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합리화하지 말라는 것일까? 혹은 포도(물질, 학벌, 권위)는 좋은 거니까, 그걸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괴로워해야 한다는 걸까? 어떤 학원에서는 '여러분의 자식이 평생 신 포도라고 자위하며 살도록 방치하시겠습니까?'라는 광고를 내걸었다고 한다. 이 동화는 많은 어린 아이들에게 능력주의와 물질주의, 성공 지상주의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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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llustration of the fable by François Chauveau in the first volume of La Fontaine's fables, 1668




보통 포도를 등지고 돌아서는 여우는 비웃음을 당하고 비겁한 존재로 취급된다. 속으로는 간절히 원하면서도 가지지 못할 것 같으니까 괜히 '신 포도'일 거라고 단정하고 자기 위로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기의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자기 상황을 인정하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짜 어리석은 건, 닿을 수 없는 목표를 잡아놓고 소중한 인생을 갈아넣는 대다수의 인간들이 아닐까?


나는 이 동화를 아래와 같이 각색하고 싶다. 여우는 포도를 포기하고 돌아서서 울타리 근처를 산책하던 중에, 열린 문을 발견했다. 문으로 들어간 뒤 포도나무로 돌아온 여우는 나무 아래에 인간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어떻게든 포도를 따먹으려고 하지만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 여우는 유유히 걸어와서 울타리 안쪽의 포도를 마음껏 즐긴다. 인간은 배아파하고 분노하며 오기로 울타리를 넘으려고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했고 실패했으니까 틀림없이 아주 달콤할 거라고 맹신한다. 오히려 동료 인간들과 싸우다가 서로 상처만 입힌다. 여우는 속으로 생각한다. '신 포도인 셈 치고 툴툴 털어버리면 되는데, 왜 저렇게 어리석게 고통받는 거지?'


여우와 포도를 다룬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탈무드에 있다. 여우가 울타리 속의 포도를 먹고 싶어서 3일을 굶어서 홀쭉해진 뒤 울타리로 들어가서 실컷 먹었는데, 나올 수가 없어서 3일을 다시 굶은 뒤에야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들어갈때나 나올때나 배고픈건 똑같다며 투덜댄다.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유사한 지점이 있다. 인간의 욕심에 대한 우화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울타리는 인생의 처음과 끝을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 즐거웠다면 되는 것 아닐까. 누군가는 어차피 죽을 거라면 태어날 필요도 없는 거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어차피 태어난 거 그 순간의 의미와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애써서 들어간 울타리 속 포도가 단 포도인지 신 포도인지 미리 알 방법은 없다. 남들한테 물어보고 고민해봤자 취향은 다를 수 있다. 평양냉면 매니아처럼 신 포도 매니아가 없으리란 법도 없지 않는가(고백하자면 나는 평양냉면을 무척 사랑한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자기 책임 하에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다. 그저 고민하고 남들 눈치만 보다 보면 포도는 다 시들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실화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동물학자가 실험을 하면서 꿀벌과 파리를 유리병에 넣어놓았다. 유리병의 뚜껑은 열려 있지만, 병의 막힌 밑부분이 햇빛이 비치는 창문 밖으로, 뚫린 윗부분은 어두운 창문 안으로 향해 있다. 머리가 좋은 꿀벌들은 밝은 곳으로 가야 탈출할 수 있다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생각과 반드시 동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강렬한 집착을 가지고 계속 유리병 바닥을 향해 부딪친다. 반면 머리가 나쁘고 집단성이 없는 파리들은 특정한 방향성 없이 이리저리 부딪친다. 결과는 어땠을까? 꿀벌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서까지 유리병 바닥에 머물다가 죽었지만 파리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병의 주둥이 부분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아무튼 이 이야기의 교훈은, 당신의 짧은 지식 하나로 인생의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동네 건달들은 아큐를 볼 때마다 “야아, 반짝반짝해졌는걸! 이제 보니 등잔이 여기 있었군.” 하고, 그의 머리를 쿵쿵 쥐어박곤 했다. 그들은 아큐가 단단히 혼쭐이 났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아큐는 십 초도 안 되어서 승리감으로 의기 양양해졌다. 자신을 짐짓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건달들은 결국 벌레를 곯려 준 꼴이 되는 것이니까.
‘네놈 따위가 뭐야. 나는 버러지야, 버러지라구.’
-루쉰, <아Q정전>

정신승리라는 말은 루쉰의 아Q정전에서 유래한 말이다. 작가 루쉰의 의도는 정신승리법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서 중국인을 계몽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정신승리는 작가의 비판적인 의도와 달리 현대인의 정신건강에 매우 유용한 방법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실패나 좌절을 경험했을 때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를 알 것이다. 원효와 아큐의 이야기는 여우와 포도 이야기와 반대되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주제가 통하는 부분도 있다. 결국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원효대사는 미처 알지 못한 채 해골물을 마셨지만 꿀맛이라고 느꼈다. 여우는 포도를 먹지 못했지만 그냥 초연하게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달리 말하면 당신이 어느 상황에 처해 있든지, 그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포도를 먹는지 마는지, 단지 신지, 해골물인지 삼다수인지 에비앙인지, 소나타인지 벤츠인지 페라리인지 여부는 결과적으로 행복과 큰 관련이 없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신 포도와 해골물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포도라는 물질이 중요한가, 아니면 만족이라는 정신 상태가 중요한가. 물질과 정신 중 무엇이 수단이고 무엇이 목적인가. 물질은 충분한 만족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불행과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면, 그건 물질의 탓인가 정신의 탓인가?


심리학에서는 '귀인이론(attribution theory)'이라는 개념이 있다. 말 그대로 원인을 어디에 귀속시킬 것인가를 말하는데, Heider가 주창한 이론을 Weiner가 발전시켜서 아래와 같은 도식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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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einer.jpg


두가지 변수에 따라서 능력, 노력, 운, 난이도에 성공이나 실패의 원인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귀인 현상에는 편향(bias)이 발생할 때가 많은데, '잘 되면 자기 덕,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처럼 자존심 때문에 실패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현상은 자주 관찰된다. 여우도 포기한 행위의 원인을 '신 포도'에서 찾았으므로 일종의 외적 귀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학부생 때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 김난도 교수님의 수업을 들은 적 있는데, 그는 자기계발의 차원에서 남 탓보다는 자기 탓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인생에서의 좋은 지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도한 내적 귀인은 실제 사회나 제도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흔히 관심병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강제적 동원과 폭력적인 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문제 당사자의 성격이나 태도에 원인을 돌리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심화시킬 수 있으며, 권력자가 가장 원하는 방식의 관점일 수도 있다. 자기 '계발'이 중요하다면 사회 '개발'과 제도 '개선'도 중요하다. 입시 제도의 문제나 경쟁주의, 서열주의, 배금주의 같은 외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기 탓을 하면 오히려 끝없는 자기 경멸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고백의 기도 라는 것이 있는데, 매주 미사에서 아래와 같은 기도문을 다같이 소리내어 암송하는 문화가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가슴을 치며> 저의 큰 탓이옵니다.
-고백의 기도


마찬가지로 노래 <걱정말아요 그대>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전인권, <걱정말아요 그대>


이 부분에서 중요한 건 '그대 탓'보다는 '털어 버리고'라고 생각한다. 힘들고 슬픈 상황에서 '내 탓'을 하든 '남 탓'을 하든 상관없이, 중요한 건 잊어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흔히 '남 탓'이라고 하면 남을 미워하거나 질투하고 복수하려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우리의 여우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의도적 무관심을 통해서 우리는 소중한 일에 집중하고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


김난도 교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속 <부러워하지 않으면, 그게 지는 거다>라는 글에서 신 포도와 여우를 젊은 세대의 현실에 비유하며, 오히려 열등감을 동력으로 삼으라고 아래와 같이 조언한 바 있다.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다니다 보면,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표현을 가끔 본다.
“네가 이룬 것은 인정하지만, 그건 내 삶의 방식과는 다른 성취이므로, 내가 부러워할 것은 없어.”라는 의미일 것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 부러워하지 않겠다는 요즘 세대의 쿨한 감성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이 말에 묘한 ‘감정’이 섞여 있는 걸 느낀다. ‘여우의 신 포도’처럼 말이다.
(중략)
질투하는 대신 선망하라. 타인의 성취를 인정하라. 설령 그의 성공에 문제가 많아 보일지라도
그대는 오히려 그에게서 존중할 만한 점을 애써 찾아, 그것을 배워라. 한껏 부러워해라.
그래야 이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성취를 보고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지는 것이다.
-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한다. 자본주의와 자기계발서에는 적합한 내용이지만, 그러한 '신 포도'주의는 결국 다수의 피해자를 만들고 소수의 성취자들마저 괴롭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고 이어령 교수도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에서 여우와 신 포도를 언급했는데, 그 내용은 정반대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래와 같은 동화를 들려주고 싶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서는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더 행복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이솝 우화는 달라졌대요. 천신만고 노력 끝에 여우는 높은 가지의 포도를 따 먹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일을 어쩌지요? 그 포도는 정말 신포도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애써서 노력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자기만 따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서라도 그것이 신 포도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지요. 모든 여우들이 부러워하는 바람에 속내를 감추고 여우는 계속 시고 떫은 포도를 따 먹었지요. 자랑스럽게, 그리고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 여우는 신 포도를 따 먹고 또 따 먹다가 결국 위궤양에 걸려서 죽었지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삶, 그것을 살기 위해서 현대판 이솝 우화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그리고 용기 있게 말하세요. 남들이 다 추구하고 있는 그 권세라는 것, 돈이라는 것. 그러한 세속적 욕망은 사실 신 포도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세요.
-이어령,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물론 포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실패를 마주했을 때, 끝까지 도전하는 용기도 아름답지만 웃으며 털어버리는 용기도 아름답다. 자기가 소중히 생각하는 다른 일을 찾아 나서는 주체성을 가진다면 말이다. 이 동화는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만약 포도를 따먹었다면 여우는 행복했을까? 일단 그 포도가 달콤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달콤해봤자 몇송이 먹으면 배가 부르다. 배가 불러봤자 몇시간 지나면 배고파진다. 포도가 상징하는 건 뭘까?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매력적인 가치는 당연히 돈과 물질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우가 신 포도라고 단언하고 돌아서는 것은, 당당히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선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용기를 내야 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못해요
-이규경, <용기>


과연 여우는 포도를 먹지 않아서 굶어 죽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먹고 살 방법이 많고, 포도 한 송이 먹지 않는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닿을 수 없는 포도를 보고도 간결하고 단호한 판단력으로 돌아서는 것은, 높은 자존감과 주체성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그는 물질적 가치가 아닌 정신적 가치, 고차원적 가치, 자아실현과 자기초월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동화에서 여우는 훌륭한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자기의 욕심과 집착에 매이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포도는 아마도 신 포도가 맞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질로부터 궁극적인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포도는 어느정도 신 포도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완전한 무소유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 능력과 상황에서 감당가능한 수준의 물질을 누리되 거기에 종속되지 않고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요한복음 4장 13-15절, <신약성경> 공동번역


예수님도 '다시 목마른 우물물'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비교해서 말한 바 있다. 나는 회의론자로서 그 답이 반드시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물질과 포도를 무한정 따먹으려고 애쓰며, 혹은 남들에게 소유한 포도를 자랑하려고 애쓰며 갈증과 집착에 빠져있는 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많은 가치에 침투할수록 예술과 음악, 사랑, 우정, 인류애, 지적 호기심, 가족, 이타심, 봉사 같은 숭고한 가치들이 신 포도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질만능주의자는 그러한 가치나 숭고함도 "결국 물질로 환원될 수밖에 없고, 따지고 보면 원초적인 금전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급한 확신은 과연 사랑 우정 봉사를 충분히 경험해보고 논리적으로 판단한 것일까? 진정 봉사를 해본적도 없으면서 저거 해봤자 남는게 뭐 있겠어 하며 자기합리화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가?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가치들을 미래 세대들에게 얼마나 경험하게 해 주었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 가족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가족의 사랑을 느껴봐야 하고, 우정을 경험해 봐야 우정의 소중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포도를 따먹기 위해 도전해 보는 것도 좋고, 다른 즐거운 일을 찾아 나서도 좋다. 그래도 '저 포도는 무조건 달콤할 거야, 저것만 먹으면 내 인생은 성공할 거야, 누구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따 먹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실패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여우는 포도를 등지고 어디로, 어떤 길로 떠났을까? 알 수 없지만,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노래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마치려고 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밴드 "Talking Heads"의 "Road to nowhere"다. 토킹헤즈는 '록음악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린다고 하는데, 다수의 조사에서 너바나, 이글스, 에어로스미스, 메탈리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음악을 남겼다. 가사에서는 nowhere(알 수 없는 곳, 아무 데도 아닌 곳)으로 가는 길에 동참하자고 말하는데, 그 특이하고 감각적인 뮤직비디오를 보다보면 어느새 몰입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LQiOA7euaYA


우리는 미지로 향하는 도로를 달리고 있어
여기로 들어와
미지로 향하는 차에 올라타
함께 가보는 거야
어쩌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겠지
난 그런 거 신경 안써
여기에서 시간은 우리들의 편이니까

내 마음속에 어느 도시가 떠올랐어
우리 함께 그곳을 향하는 길에 올라타자
괜찮아, 친구, 다 잘 될 거야
아주 먼 길이라도
날이 갈수록 더 멀어진다 해도
괜찮아, 친구, 다 잘 될 거야
같이 떠나고 싶다면
나와 함께 노래 부르자
-Talking Heads, <Road To No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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