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라는 감정의 빛을 느껴보아요. with 타막여우

by 타막여우

기억, 니은, 디귿, 리을. 한글 자음들을 조심스레 써내려가던 어느 밤이었습니다. 갑자기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예쁜 단어들이 솟아나와, 고운 한글로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커다란 달 안쪽 아래 앉아있었습니다. 달빛은 빛쇠빛과 개나리빛이 섞인 오묘한 빛깔로 저를 감쌌지요. 그러다 문득, 몸이 붕 떠오르더니 쾅 하고 마룻바닷에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더니, 모든 것은 하룻밤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너무 또렷해서, 누군가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달빛 아래에 앉아 있던 그 때가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나는 다시 그 달빛과 함께 호숫가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그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슬이 반짝이는 호숫가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순우리말로 시를 써내려가는 제 자신을 그려보았습니다.

웃기면서도 저프고, 또한 아름다운 이 꿈. 정말 제 꿈이 참이 될 것 같지 않나요? 몇 날 동안 저는 그날 꾼 꿈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달빛 아래에서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달항아리를 본 적 있으신가요? 달항아리는 보통 항아리와 달리 하얗고 깨끗한 흙으로 빚어 만듭니다. 이 흰 흙은 단단한 화강암에서 얻은 백토인데, 곱고 고운 빛깔을 내는 게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 백토는 다루기가 쉽지 않아, 며칠 동안 정성껏 치대야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흙을 치대는 모습을 떠올리다 보니, 손으로 만지는 장난감인 슬라임이 생각납니다. 혹시 슬라임을 만져본 적 있으신가요? 슬라임은 만졌을 때의 느낌, 냄새, 빛깔, 소리까지 모두 달라서 만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여러 번 만지다 보면 물기가 생기거나 숨방울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럴 땐 슬라임을 며칠 동안 통에 넣어 두었다가 다시 꺼내면 말랑말랑해집니다.

이렇게 며칠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신가요? 기다림 끝에 다시 말랑해진 슬라임을 만지는 그 순간, 어떤 표정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하얀 흙을 곱게 치대고, 그것이 익기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설레는데, 그 흙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얼마나 더 신날까요? 마치 아이를 열 달 동안 품고 기다리는 마음과도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바람은 설레는 마음이 담기는데, 한국의 얼이 담긴 바람은 저픔이 느껴집니다. 무슨 의미인지 계속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슬라임 위에 여러 가지 고명을 얹으면 다양한 느낌이 살아나는 것처럼, 우리 식탁에도 여러 고명을 올려 맛을 더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각자 입맛에 맞게 골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비빔밥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비빔밥은 "당근이 싫어요!" 하면 당근을 빼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일까요? 맞아요. 비빔밥은 처음 나왔을 때 여러 먹을 거리가 한눈에 보여서, 싫은 고명은 빼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빔밥은 요즘 새로 만든 먹거리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입맛을 생각해서 만든 걸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처음 먹어봤던 비빔밥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함께 비빔밥이 어떤 먹거리인지 생각해봅시다.

어릴 적,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 쪽 집안에 모였던 날입니다. 제사는 돌아가신 분을 마음에 담는 날이라 마음이 무거웠지만, 제사가 끝난 뒤에는 살아 있는 가족들이 모여 따뜻한 밥상과 마음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날, 제사상에 올랐던 여러 먹거리를 한 대접에 담아 비벼 먹는 어른을 보았습니다. 저도 따라 해 보았지요. 제사상 앞에서 젓가락질을 멈추지 못하던 제가,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니 더 이상 젓가락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대신 숟가락질은 멈출 수 없었지요. 사실 그 고명 중 제가 싫어하는 나물도 있었습니다만 생각보다 훨씬 맛있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맛있게 먹는 모양을 보신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증조할아버지, 할머님께서 맛있게 드셨던 먹거리를 내새끼 그릇으로 보내주신 것 같구나."라고요. 그 말씀을 들으며, 살아계시지 않은 증조할아버지, 할머니와 마음이 이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비빔밥은 저의 먹거리를 가려먹는 버릇을 고쳐준 음식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과 다시 만나고 싶고, 이어지고 싶게 만드는 마음이 담긴 먹거리였습니다. 오늘날 저는 비빔밥을 먹을 때마다 저와는 다른 세월을 살아가셨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며 한 숟가락 하는 마음그림을 합니다.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에게는 참 소중한 순간입니다.

제주도에는 마을을 지키는 돌하르방이 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마을이 늘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솜씨이지요. '하르방'은 제주 말로 '할아버지'를 뜻합니다. 지금 같은 세월 할아버지가 곁에 없더라도 돌하르방처럼 든든히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한국은 죽은 사람과 이어지고 싶은 바람이 담긴 삶의 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후위기로 자연이 달라지는 걸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제주도 주상절리는 25만 년 전 화산활동이 활발했을 때 용암이 빠르게 굳으며 생긴 곳입니다. 엄청나게 별난 육각기둥 모양 바위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지만, 기후 위기로 바닷물이 높아지면서 깎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사하라 모래벌에는 '사하라 눈'이라 불리는 곳은 오랜 세월 땅이 솟았다 깎였다 하며 만들어진 곳이지요. 지금은 깎임만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어떤 모양이 될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사하라 눈도 제주 주상절리도 그 빚음이 어떻게 달라질지 생각하면 설레기보다 아쉬움이 앞섭니다. 저는 저픔을 느끼지만 어떤이는 바람을 느낄 수 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순우리말로 다시 한 번 달빛 아래에서 시를 쓰는 모양을 마음그림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은 어떤 숨결을 내쉬고 있었나요? 그 느낌, 앞으로 어떻게 남기고 이어갈지 생각해 봅시다. 먼 훗날, 당신은 아이와 어떤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그려봅니다. 이 글이 여러분에게 타막여우가 잠시 그늘에 쉬듯 작은 쉼표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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