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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in Apr 09. 2024

나와 너의 염증

어른의 길을 걸어가는 그대들을 응원하며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뼈 빠지게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이 모양일까?’


 이 박한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일 들정도로 힘겹게 살아온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카드빚과, 나이와, 흰머리와 시련뿐이라는 것을 살다 보면 겪게 된다. 그럴 때마다 무너지고 싶어도 다시금 짚고 일어나려고 하며 살 수록 사람이 점점 더 염세적으로 변하곤 한다. 그러면서 힘들 때마다 술과 담배를 통해서 세상이나 사람을 저주하게 된다, 그런 씁쓸한 인생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문득 내 아버지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부모님을 보면서 그 어떤 때보다 강한 영웅으로 보곤 한다, 어쩌면 부모님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혹은 본인 스스로 의지하곤 하지만, 나는 특히나 아버지를 보며 저 남자를 뛰어넘을 남자는 없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나는 한 부모 가정으로 아버지 밑에서 대부분의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와 함께 있던 순간은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이 대다수로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한 몸으로 세 형제를 장성하게 키워내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그러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 마저도 단 세 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할아버지가 화장하러 들어가실 때 아버지께서는 크게 할아버지의 관을 향해 ‘아버지! 뜨겁습니다!’라고 소리치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셨다, 그 어떤 힘들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아버지는 묵묵한 표정으로 견디기만 했던 그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는 처음으로 눈물을 삼키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그저 멍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우리 형제들 모두가 멍하니 평소같이 지낸 듯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남의 집에서는 곡소리가 나는데 우리 집은 아니라고 투덜거리셨다.


 그러다가 나는 할아버지의 입관 때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주 크게 울었다, 어른들은 가만히 내려다보고 나는 그 순간 왠지 모를 울컥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실감이 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우시거나 하긴커녕 그저 할아버지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두 번째로 본 것은 내가 고등학생 때이다,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 겹치면서 아버지는 집에서 술을 드시는 일이 많았다, 꽤나 과음했다고 생각한 그날에도 다음 날 웬만하면 출근하셨다, 심지어 아침마다 운동까지 해가시며 우리가 자는 이른 아침에도 일찍 출근하셨다,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아버지는 술을 드시다가 하루는 우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가슴에 왠지 모를 대못이 박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세 번째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나에게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으셨다. 그런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와닿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제는 정면으로 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왠지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꾸역꾸역 집어넣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남자가 울 때는 단 세 번 뿐이라고 말하시면서 우리에게 울지 말라 호통치곤 했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쩌면 세상의 힘든 일을 모두 맞아낸 것은 아버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 아래에서, 나는 씁쓸하게 담배 연기만 뱉어내며 하늘만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이전의 세상에서 부모님들은 과연 얼마나 힘든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보다 멋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다그치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이가 먹고 가정이 형성되면 남들 모르는 앞에서 부모님을 찾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가정을 꾸리고 싶어지지 않아 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그 쓰라린 아픔을 우리가 겪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어쩌면 우리는 좀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내가 그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에 적응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흔한 공익 광고처럼 부모님에게 사랑하라고 말하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왜 난 아직도 이 모양일까’라고 생각이 들 때라면 부모님을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적어도 부모님은 그대가 열심히 했다는 것을 알아주리라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을 내길 바랐다. 우리 모두 넘어지고 쓰러지고 싶을 때가 있더라도 당당히 일어설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겨내야 할 가장들, 그리고 씁쓸함에 울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세상의 사회인들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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