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 혁명가를 응원하며
성공의 기쁨보다는 좌절의 슬픔을 겪는 일이 더 많고, 늘 시험으로 스스로를 평가되는 인생에 적응하면서,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인생이 우리에게는 평균이 되었고, 그것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어릴 적 품었던 꿈은 잊어버리거나 그저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걸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버린 후에야 내가 살아왔던 과거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닫고 나서야 실행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세상이 암울하고 어둡기만 했던 시대에,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들어질 때면 젊은 혁명가를 꿈꿔온다, 혈기 왕성하고 혁신적인 사람이 지금의 삶을 개혁하기를 바라면서,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이 더욱 윤택해지길 바라며 그 상황에 그저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가가 등장한 시대, 지금 이 시대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젊은 혁명가를 꿈꿔 오고 있다, 몇 번의 혁명과 혁신 뒤에서도 우리의 삶은 새롭게 바뀐 시대에서도 윤택해지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빈부격차와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형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과연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행복’ 하다는 생각을 ‘불행’ 하다는 생각보다 더 많이 하긴 하는 걸까, ‘소확행’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얼마나 큰 행복을 누리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에 작은 것에서 우리는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가끔은 이런 염세적인 생각을 해보곤 한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남들이 웃으면서 자신의 미래와 연인에 대해서 꿈꿀 때, 나는 홀로 글을 써가면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토로하기 시작했다. 빈 종이에다가 그저 글을 끄적이면서 말이다.
내가 그래왔음에도, 나는 지금도 무모한 꿈을 꾸고 있는 ‘젊은 혁명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걱정과 우려, 그리고 조금의 질책을 가하며 현실적인 꿈을 꾸라면서 지적을 하곤 했다, 지금도 그래오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성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왔던 시간이 다른 사람보다 많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게 과연 인생의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훈수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보다 ‘먼저’ 살았고 ‘많이’ 살았다는 이유이다, 그 많은 경험들 속에서 실패와 성공을 배우고 그것을 젊은 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자기가 겪었던 실패를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훈수의 이유이다.
내가 봐왔던 사람들 중에는 본인이 젊은 나이이며,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삶에 안주하면서 이러한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마저 희망하고 원하는 사람을 본 적이 꽤 많다, 그런 사람이 젊은 혁명가가 될 수는 없다, 그 사람은 이미 사회의 부품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회의 부품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한 사람이 이 세상에는 100명, 1000명은 더 되리라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젊은 혁명가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그렇게 인생의 훈수를 통해 만들어진 인간은 그저 사회의 기계가 될 뿐 더 나은 삶이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인생의 훈수를 젊은 혁명가들에게 했을까, 혹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우리들 ‘젊은 혁명가’ 될 수 있었던 우리가 들었기에 우리는 사회의 부품이 되었던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의 변화와 개혁은 이제는 우리의 손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적어도 나의 손으론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 것이다, 현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인생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나는 사회의 부품으로써 남들에게 조언이라고 포장한 말을 남들에게 계속 말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