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모든 것을 담지 못하기에, 보면서 다시 기억이 난다.
제주도의 어느 겨울날, 나는 혼자 바닷가에 섰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거친 파도가 해안가 바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태양은 서서히 기울며 하늘과 바다를 따뜻한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다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를 누르기 전, 나는 렌즈 너머의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불분명했고,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태양은 낮고 부드럽게 내려오며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 순간, 나는 단순히 아름다운 장면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스며들던 감정을 담고 싶었다.
셔터 소리가 울렸지만, 사실 내가 담고자 했던 건 사진 속에 전부 담기지 않았다. 사진은 바다와 태양의 모습을 남겼지만, 그 순간의 공기와 소리, 그리고 내가 느꼈던 고요한 충만함은 사진 바깥에 머물렀다. 사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의 작은 단서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단서는 내가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가 되었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와 그 사진을 다시 꺼내봤다. 사진 속 바다는 그대로였지만, 그 사진을 보는 나는 달라져 있었다. 사진을 통해 떠오르는 것은 단지 태양과 바다가 아니었다. 그날 내가 느꼈던 차가운 바람, 귓가에 울리던 파도 소리, 그리고 홀로 서 있던 내가 느꼈던 묘한 평온함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사진은 단순히 이미지를 남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느꼈던 감정을 다시 꺼내어 주는 기억의 상자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장면 속에서, 우리는 늘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
나는 오늘도 카메라를 든다. 단지 보이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순간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서다. 언젠가 그 사진을 다시 꺼내볼 때, 지금의 나를 기억하며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