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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르타르 Aug 09. 2018

위험이라는 파도 앞에선 개인

울리히 벡, <위험사회> /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리뷰

목요일, [단숨에 책 리뷰]
열 번째, 열한 번째 책 : <위험사회>, <이상한 정상가족>

이상한 정상가족은 아동을 학대하는 한국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석했다. 기자 출신 작가가 쓴 책이라 술술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강추 강추 강강추! 그에 비하면... 위험사회는 너무 어렵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


1. 왜 읽었나

신문 사회면엔 생활고를 비관해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죽는 일이 종종 실린다. 부모가 자녀를 학대하는 현상에 대한 기사도 확인할 수 있다. 아동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이 현상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을까 궁금했다. 마침 <이상한 정상가족>이 이를 분석했다는 소개글을 보았다. 독서 모임에서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었다. 이 책이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중 일부 내용과도 연관이 된다고 생각했다. 독서 모임에서 발제한 내용을 가져와봤다.


2. 무슨 내용인가

개인(個人, individual)이 위험사회에서 마주한 모순

[우선 <위험사회>부터]

사회가 개인화된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이 질문은 서구 근대가 만든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서구 근대는 개인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온전한 ‘나’로 살 수 있을까를 중요하게 고민했다. 과거엔 백인, 중산층, 남성들만 온전한 ‘나’로 살 수 있었다. 비(非) 백인, 여성, 빈민층은 구조 속에서 ‘나’로 살기 위해 투쟁했다. 반 인종차별 운동, 차티스트 운동, 페미니즘 등이 그 예다. <위험사회>라는 책으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 투쟁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보고 있다.


벡은 “수십 년 동안의 본질적인 전환점은 여성성에 의해 귀속되는 전통적인 특질들에서 여성들을 다소나마 해방시켰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여성이 ‘남성이 규정한 여성성’에서 어느 정도(서구 사회에선 그럴 수도, 한국사회는 한창 진행 중이라고 생각한다.) 해방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다섯 가지 점에서 확인된다고 했다. 첫째, 인간의 기대수명 연장으로 여성의 생애주기가 바뀌었다. 아이를 낳는 것만이 여자의 책무라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아이를 낳은 이후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둘째로 2차 대전 이후 기술 발전으로 집안일이 덜어졌다. 셋째, 임신중절이나 피임 및 가족계획의 역할이 커졌다. 이 점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했다. 넷째, 이혼이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노동시장에 편입되는 여성이 많다. 마지막으로 교육기회의 균등화가 여성의 직업 동기 부여를 높이고 있다. 벡은 이런 모습들이 과거와 달라진 가족제도와 개인주의적 인간을 만든다고 분석하였다. 비백인과 노동자들의 투쟁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사회가 점점 개인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순이 발생했다. 위험사회에서 가족과 분리된 개인은 위험을 그대로 직면해야 한다. 위험사회의 위험은 산업사회의 위험과 결이 다르다. 예측 불가능하고 무차별적이다. 핵발전소 사고나 기타 화학물질 사고 등을 보면 개인화된 사회는 위험을 혼자 감당하게 했다. 개인은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왜소한 한 사람일 뿐이었다. 이는 개인화된 사회가 마주한 모순이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북악36경>. 거대한 파도 앞에 선원들이 납작 업드려 있다.
한국 사회 속 가정 

[이상한 정상가족]

그럼 우리나라의 가족 제도, 문화는 어떠한가? 김희경이 이를 분석해 <이상한 정상가족>이란 책을 썼다. 그는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지 않은 사회에서 가족이 어떻게 살아남아왔는가에 주목했다. 


한국의 산업사회는 효율성을 추구했다. 짧은 기간에 빠르게 경제성장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때문에 사회적 안전망을 건설하는 작업을 소홀히 했다. 그 결과 사회가 만든 문제는 고스란히 가정으로 넘어갔다. 사회적 위험은 가정이 헤쳐 나가야 했다. 가정은 배였다. 가장은 선장이고, 가족 구성원은 선장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선원이었다. 가족 구성원이 총력전을 펼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였다. 그리고 이런 모습의 가족이 이른바 ‘정상’ 가족으로 여겨졌다. 가부장적 사회가 공고화된 것이다. 이런 가족 구조에서는 가장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선원을 쉽게 체벌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가정 폭력, 아동 체벌의 코드가 여기에 있었다.


게다가 정상 가족을 구성하지 못한 가족은 쉽게 무시당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미혼모 가정 등은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적응할 수 없는 사회였기 때문에 경제적 빈곤에 빠졌고, 주변 사람들은 이를 무시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리고 가족주의에 기반을 둔 편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김희경은 이런 고리를 끊기 위해 사회적 안전망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두고 ‘가족의 짐을 사회로’ 옮기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회가 가족에게 떠넘긴 짐을 다시 사회 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것이 자율적 개인을 만드는 길이며, 열린 공동체로 가는 방법이라고 본 것이다. 


아동학대를 다룬 시사인 기사 / 링크 :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1123   


3. 어땠나

한국 사회 역시 가족주의를 탈피하고 진정한 개인화의 과정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위험사회에서 말한 것처럼 개인은 위험에 취약하다. 그렇다면 예측 가능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위험사회에서 개인이 마주한 위험을 극복하는 개인화란 어떤 것인가? 김희경이 말한 사회적 안전망은 개인이 파편화되지 않도록 막아줄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울리히 벡이 말한 성찰하고 연대하는 개인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이 온전한 ‘나’로 살면서도 연대를 통해 위험 사회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보완되어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고민도 실마리도 함께 던져줬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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