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연재 Feb 26. 2020

표현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시대

다양성의 물결에 힘을 빼고 가야 한다. 그래야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요즘 머리와 눈이 피로하다. 나뿐만이 아닌 요즘 4차 산업 기술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질병일 것이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게 너무나 많고, 알 필요도 없는 정보들에 의해 숨을 가쁘게 쉬게 만든다. 화장품 하나 필요해서 사러 상점을 들어가도 상품의 홍수에 휩싸여 정작 내가 구매하려고 하는 제품은 뭐였는지 잊고 못 보던 제품들을 어느새 얼굴에 찍어 바른다. 책을 사러 서점에 가도, 베스트셀러 서적에는 왠지 신뢰가 가지 않아 모든 책 코너를 둘러보지만 비슷비슷한 자기 계발서에 깊이감 없는 잡지 같은 책들에 둘러싸여 뭘 택해야 하는지 모르게 한다.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SNS를 통해 어떤 무언가를 찾고자 해도 후기나 댓글 그리고 좋아요의 숫자가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에 한스탭 물러서게 한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지금 현재는 '미친 과잉 다양성'이 존재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의 물결을 잘 타고 기회를 잘 잡는 사람들은 특별한 비주얼이나 재주로 평범한 사람에서 연예인급 일플루엔서가 되고 돈도 벌 수 있다. 그리고 손가락만 움직이며 세계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교적인 사상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지난달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의 설리가 자살을 했다. 누가 봐도 부러울만한 아름다움과 부를 가진 어린 소녀는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한 건데 그 점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다. 왜 그녀가 악플러에게 그토록 지탄을 받아야 했던 걸까? 10년 정도 해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자기표현에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미대에서 생활했던 나에게는 설리가 했던 행동들이 자연스러운 부분이라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성격 책이나 도덕책에서 가르치는 규범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그녀가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감안하면 설리는 숨 쉬는 것처럼 자기표현을 했던 것이다.


첫 번째 그녀가 지탄을 받은 것은 성적인 표현을 음식이나, 일상 소품 등으로 표현했다. 우리나라 아이돌이 그런 표현을 한 것이 물론 충격일 수 있다. 여자 아이돌은 남자팬들의 상상 속에 있는 깨끗하고 퓨어한 소녀의 판타지에 스크래치를 내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리의 직설적이고 천박한 표현은 그런 판타지를 산산조각 깨트리며 동시에 도전하는 행위로 본다. 복숭아 같은 청순한  여자가 그러니 남자들에게는 도전장을 받은 셈이다.

정신 분석학에 따르면 남근기인 phallic stage (3세~6세)에 자신의 자 형성이 되며 자신을 동성인 아버지에 일체화시키고자 한다. 이 시기에 어머니에게 떨어지지 않으면 거세된다는 공포에 어머니에게 독립하고자 하며 사회로 나아가는데  이때 근친상간적 성적 욕구를 깊은 곳에 숨긴다. 이렇게 어린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갈등을 수차례 극복하며 성인이 되고 성인이 된 후에도 욕망을 극복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설리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인 성기 모양의 이미지나 성적표현은 거세된 그것을 직시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설리의 행동에 빗대어 비슷한 이미지의 작품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페미니즘 아트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주디 시카고 Judy Chicago의 작품 Dinner Party도 설리가 받은 악플만큼의 비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Dinner Party는 서양 역사에서 주요한 여성 인물의 39명을 위한 만찬을 표현한 작품이다. 각 테이블보에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고 각 자리마다 역사적 인물에 맞춘 식기들이 놓여있다. 플레이트를 가만히 보면 음식이 아닌 이상한 형체의 꽃들이 올려져 있다. 바로 여성의 생식기를 펼쳐놓은 모양을 접시로 만들어 세팅한 것이다.  또한 바닥 타일에는 사회와 여성들의 역사에 영향을 준 여성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여자의 생식기를 대놓고 축제의 장을 꾸민 이 작품은 그 당시 많은 비판과 논란을 받았다. 심지어 미술 작품이라고 볼 수 없으며 같은 여자들에 대한  모욕이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 속에서 지워진 영향력 있는 여자들의 업적을 축하하며 기리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졌으며 동시에 여성의 힘은 '남근이 없는 상태'에서가 아닌 여성 자체에서 나온다는 개념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미지는 너무나 낯설고 남성성의 근원이라 믿는 남근의 거세를 의미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여성 작가에 대한 목소리가 더 뻗어 나갈 수 있었으며 미술사에서도 페미니즘 시각으로 미술과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설리가 시각미술 작가가 아니라는 점은 알지만, 그녀도 아이돌 출신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아티스트다. 그게 충동적인 행위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내적 자아를 거침없이 표현한 하나의 작품인 것이다. 이미 주디 시카고가 페미니즘 미술에 도전장을 내민지도 거의 50년이 되어간다. 그간에 사회적으로 다양한  변화가 있었는데 20대 초반 여자아이가 포스트 한 성적인 기호 이미지들이 그렇게 큰 문제로 삼을 만큼 큰 문제였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녀의 행동이 그냥 미쳐서 아니면 돌+I, 관종이라고 비난만 할게 아니라 왜 우리가 이런 것을 문제 삼아 비난하는 것인지 말이다.

                                               

Judy Chicago, Dinner Party, Mixed Media, 1979


두 번째는 '노브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닌다. 브라를 착용하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녀가 브라를 착용하지 않는 행동보다는 여자의 몸을 비판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않음 몸'을...

역사적으로 여자의 몸 그리고 의상은 정치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여자는 남자들의 눈에 보이기 위한 오브제로 인식이 되던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브라도 코르셋의 일부였다. 여자들은 수많은 종류의 의복 garments와 장치 devices를 통해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 가리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숨을 쉴 수 없이 갈비뼈를 쪼여 가슴을 올려주어 아름다운 곡선이 부각되도록 하였고 드레스 위로 풍만한 가슴이 보이게 하는 것이 완벽한 여성 몸이라고 믿어왔다. 19세기가 되어 통짜였던 코르셋이 위아래로 나눠지며 가슴을 쪼여주는 장치인 브라 그리고 허리를 쪼여주는 거들이 생긴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납작한 가슴을 선호하는 이들을 위해 천으로 덧대어 가슴의 모양을 납작하게 해주는 밴드 형태의 브라,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가슴보호대를 위한 총알 모양의 브라 등 다양한 브라 모양의 변천사가 있다.

여자들의 개미 허리를 만들어주는 코르셋


상. 하 가 나눠진 코르셋


여성성의 상징이 되어버린 브라는 여자들의 미적 취향에 의해 결정된 몸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으며 남성들의 시각과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도구였다. 시대가 진보되며 점점 몸을 조이고  정치적으로 여자의 몸을 구속하는 도구가 된다. 1960년 진보적 성향이 강한 나라 미국에서는 여자들이 가정주부와 엄마라는 stereotype 정체성을 개혁하며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지향하고자 시위를 했다. 1968년 뉴저지에서 일어난 시위에서는 150명의 여자들이 Miss America 콘테스트와 미의 기준에 대해 비판했으며 남자로부터의 독립을 기호화하는 브라를 불태웠다. 이것은 여자들의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다.

Atlantic City, September 7, 1968

설리는 가수라는 꿈을 위해 달려온 동시에 상품으로 만들어진 아이돌이었다. 그 갑갑한 제약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투쟁한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만의 자유로운 표현법이었으며 그 속에 녹아있던 것은 사회를 향해 저항하는 여자의 인권이다. 투쟁은 우아하게 도덕적으로 되지 않는다. 매끄럽지 않고 즉흥적이며 서툴고 우발적일 수 있다. 그래서 설리가 대중에게 표현하는 방식이 반항적이라 대중은 생각했을 것이고 그중에 말을 칼처럼 쓰는 악플러들은 악의적으로 상처 주는 말을 쓰면서 고통을 준 것이다.

'페미'라는 단어로 페미니즘의 진정한 뜻이 왜곡되면서 불미스러운 뜻으로 인식되는  한국 사회에서 설리는 희생양이 된 것이다. 글쓴이는 설리의 팬도 아니며 안티팬도 아닌 거리를 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느낀 것을 적은 것이다. 단일 민족인 대한민국은 다양성을 이해하기란 열악한 환경이다. 나의 생각과 다르면 타인은 이상하고 틀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고 대한민국에도 다문화 가정이 많이 생겨나며 세계와 옆집처럼 이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영어 단어 한 개라도 더 외우면서 국제적인 무대로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양성에 대한 오픈마인드가 더 시급하다. 더 이상 이런 희생양은 볼 수 없지 않은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