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들과의 여행은 무계획이 계획입니다 @제주도
이번 여행 제주도에서 가장 아찔한 순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타인의 사유지 탐방이 아닐까 싶다. 말이 탐방이지 사실 무단 침입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이미 들어간 후에 알게 되었다. 뒤늦게 변명을 하자면 정말이지 몰랐다. 그런데 아직도 모른다. 그곳이 차로 갈 수 있는 길이었는지는. 여행 중에는 모든 것이 처음이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이미 알았으면 갔겠나?
오후 네시 정도였을까. 제주도의 관광명소 중 하나인 오설록 티 하우스에서 한 시간 남짓 안 되는 티 클래스를 듣고 나와 시간을 확인했다. 햇빛도 좋고 공기가 청량하다. 또다시 실내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서울은 지금쯤 쌀쌀한 날씨로 시큰한 공기가 비염 있는 코를 시큰하게 할 텐데. 역시 제주도는 달랐다. 북서태평양의 온기가 품어줘서 인지, 지난 몇 개월 동안 일 때문에 배배 꼬여 있던 긴장된 근육들도 서서히 풀리는 듯했다. 예민한 몸 역시도 이 섬의 대지가 주는 여유와 희망을 느끼는지 꽤나 잘 적응하는 모양새다. 마지막 날을 뭘로 장식할까 생각하다 ‘남송이 오름’으로 가기로 정했다.
그곳은 오설록 티 하우스에서 상당히 가까웠다. 제주의 맑은 하늘을 자연 속으로 들어가 느끼고, 해가 저무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동시간을 최대한 아낄 수 있는 곳으로 결정했다. 해가 지기 전에 등산과 하산을 해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운동부족인 내 체력이 버틸 수 있을까 내심 걱정도 되었다. 평지 걷는 것도 숨이 가쁜데, 오름은 내게 중상급 정도의 등산이었다. 월요일 출근을 위해 내일 비행기 타고 무사 귀가하기 위해서는 몇 분이라도 빨리 오름을 찾아 다녀오는 게 우선이었다. 119의 도움을 받아 어두 껌껌한 숲을 내려오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내비게이션에 ‘남송이 오름’을 목적지로 설정했다. 운전석에 앉은 친구 역시 휴대폰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찍어 이중 안내를 걸어 놨으니 단시간에 길 찾는데 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러나 예측은 함부로 섣불리 하지 말아었야 했나.
커다란 부지를 자랑하는 신화 월드 리조트가 보이는 곳까지 왔다가 크게 차를 한 바퀴 돌고 나와 다시 내비게이션의 방향을 따라갔다. 그런데 바로 앞에는 아까 지나친 푸른 녹색의 차 밭이 있었고 그 밭길 쪽으로 나아 있는 좁은 길로 안내하는 것이다. "여기가 맞아?" 수십 번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다. 셋다 처음인데... 그 길은 생각보다 너무 깨끗하게 닦여 있고 심지어 차바퀴가 굴러갈 수 있게 안내하듯, 바퀴 자리는 흙 길로 뻗어 있었다.
“여기 찻길 나 있네. 일단 가보자! 위로 길 나아 있을 거 같아” 순간적 의심이 올라온 순간 운전하는 친구의 자신감에 찬 말을 듣고 다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이 있으면 다시 내려가는 길도 있으니 괜찮을 거라 다독였다.
경사가 상당히 급격한 것을 느꼈고 바퀴가 살짝 헛돌았다. 순간 머리에 스치는 건 ‘견인차를 불러야 하나? 이 차를 누구에게 빼 달라고 부탁해야 하지? 경찰이 오면 어떡하지?’ 오만가지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액셀을 밟아 영차 하고 오른 순간 커다란 돌덩이가 50m 앞에 보였다.
“언니 저거 좀 치워줘야겠어.”라는 운전석 동생의 말에 돌멩이를 살피러 내렸다.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보았다. 꿈쩍도 안 한다. 양손을 써서 힘껏 밀었는데, 계속 버티고 움직이지 않았다. 뒷좌석에 있던 친구가 내려 같이 힘껏 차나무 쪽으로 밀었다. 다행히 차나무가 상하지 않게 안전하게 굴러 착지했다.
돌멩이를 치우며 그다음 길을 찾느라 허우적 되던 불안감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 사르르 사라졌다.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풍광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옷매무새를 잘 다듬은 슈트를 입은 매끈한 사람들처럼 줄 맞춰 곧게 뻗은 차나무들과 파란 하늘이 넓게 끝없이 펼쳐졌다. 난리 법석 끝에 남의 사유지에 잠시 머무는 중이라 미안해야 하지만, 이 광경을 그냥 지나치는 게 더 큰 죄인 거 같았다. 실수로 온 길 끝에 이러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행운이었다. "이미 이렇게 된 일 어쩌겠어. 사진에 담고 가자!" 우리는 넋을 놓으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밑에 차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차 밭길 위에 있는 우리들을 이상하게 생각할 테지만 말이다.
해가 점점 더 내려와 하늘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는지 “아 참! 우리 진짜 오름 가야 돼”라는 친구의 말에 재빠르게 다시 차에 탔다. 다행히 ‘ㄷ’ 자로 내려올 수 있는 길이 있어 우리는 그 길을 따라 대로로 다시 내려갈 수 있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길이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우리에게 안내해줘서 꽤나 즐거웠다. 하지만 그 아찔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