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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연재 Aug 08. 2021

오필리아 처럼 몸에 힘을 빼보자

라파엘전파 존 에버렛 밀레의 <오필리아>에 대한 다른 시선.

모르겠어? 그럼 일단 누워서 힘을 빼. 굳었던 목에서부터 손끝, 발끝까지 모든 신경을 동원해서 움직이지 마.

넌 그냥 그대로 흐르는 거야.

그냥 그 물결에 몸을 맡겨 떠 내려가는 거야.

네가 눈을 다시 떴을 때 어디에 도착해있을지는 모르지.

더 꽁꽁 얼어버릴 차디찬 바다 한가운데 일지,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어떤 섬 뭍에 머리가 닿아 더 이상 떠내려갈 곳이 없어질지.

그건 아무도 몰라. 흐르는 시간 만이 알지.

머리가 뭍에 닿았을 때 알 거야. 그때가 다시 일어날 시기라는 것을.


-<오필리아>의 작품을 보고 나서 떠오른 느낌-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대표작 <오필리아>의 작품을 보고 문득 떠오른 대로 쓴 글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햄릿의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 오필리아의 시체다. 이 그림을 아무리 뚫어지게 봐도 죽은 여자의 몸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입과 눈을 감지 않고 있고, 손끝에 신경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화려한 색감의 예쁜 제비꽃들도 이 여성의 드레스에 장식된 듯 함께 떠내려가고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다.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 오필리아 (1851-52)


오필리아는 극 중 덴마크 왕자인 햄릿과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다. 햄릿 왕이 죽은 후 그의 남동생 클라우디우스는 왕비인 거트루드와 결혼하며 왕의 자리에 오른다. 이러한 모습이 억울해서였을까, 햄릿 왕은 저승세계로 가지 못하고 귀신으로 이승을 떠돌아다녔고, 덴마크 보초병들은 햄릿 왕 귀신을 보았다고 소문을 낸다. 이 소식이 햄릿 왕자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직접 왕 귀신을 만나게 되었고, 왕 귀신은 자신의 죽음이 사리 풀 독살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며 아들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햄릿은 맨 정신으로 복수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하였고, 오필리아에게도 이 미친 연기는 계속되었다. 이에 상심한 오필리아는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에게 햄릿의 이상해진 정신상태를 알렸고, 이들은 햄릿이 환각제에 손을 댓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한편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 귀신의 복수를 진행하기 위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했다. 왕이 클라디우디우스에게 살해를 정말 당했는지 진실 여부를 확인해야 했고, 그는 떠돌이 극단을 만나 클라디우스와 햄릿 왕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극본으로 짜서 클라디우스와 거트루드 앞에서 연극을 선보였다. 이 연극에 반응하면 이것은 명백한 타살인 것이다. 클라디우스는 귀에 독을 넣는 독살의 장면을 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라졌고, 햄릿은 귀신의 말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햄릿은 어머니 거트루드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융단 뒤에서 인기척이 있는 것을 느꼈고, 클라디우스가 숨어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햄릿은 검으로 융단을 향해 힘껏 찔렀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우스였다. 오필리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연인인 햄릿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정신적 충격을 받고 미치게 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햄릿> 내에서 오필리아는 무엇하나 뚜렷하게 부각되는 캐릭터가 아니다. 순서대로 신, 아버지, 오빠 그리고 햄릿에게 복종하는 순종적인 캐릭터이며 자연의 순리대로 '어린아이'처럼 사는 여성이다. 순수하고 여성스러운 캐릭터로 표현되지만 달리 말하면 자신의 주체성이 없는 생각이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오필리아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으며  타인의 생각과 의견에 의지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심지의 그녀의 죽음 역시도 불문 명하다, 신부는 오필리아의 장례식장에서 "그녀의 죽음은 미심쩍다"라고 말하며 그녀의 죽음의 원인이나 환경에 대한 애매모호함을 드러낸다. 자살로 추측이 되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앉아있다가 부러지며 진흙탕 개울에 빠져 죽었다는 추측도 있다.


영국 회화작 특히 19세기 작품들은 프랑스 회화작과 비교하면 조명을 덜 받았다. 하지만 밀레이의 작품은 영국스럽다고 말할 만큼 특별함이 느껴진다. 왜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오래도록 응시하며, 영화나 화보에서도 이 오필리아의 죽음 장면이 상징적으로 회자될까 한 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

아마도 밀레이는 이러한 오필리아를 그릴 때 인간의 죽음에 중점을 맞추기보다는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연에 회귀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은 문화나 시대적 배경을 초월한다. 언제든 가면 따듯하고 포근하게 안아줄 것 만 같고, 조금만 견디면 다른 계절이 온다. 자연의 계절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지연될 수도 없다. 만약 오필리아의 죽음이 주제가 되었다면 배경 역시도 추운 겨울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이 꽁꽁 얼어있어 물에 뜬 시체 역시도 얼어붙어 물살에 흘러내려가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밀레는 4월로 돼 보이는 봄 같은 계절성을 푸릇한 풀과 유유히 흐르는 Hogsmill강을 함께 그려 넣어주면서 멈추지 않는 자연의 섭리를 표현한다. 마치 보는 관람자들도 오필리아의 모습에 시선을 둔 채 이 시냇물을 따라 끝이 모르는 어딘가로 흐르는 듯하다.


그래서 난 이 그림을 보면 긴장되었던 나의 몸 역시도 느슨해지며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맡겨본다. 오필리아가 나약하고 순진무구한 캐릭터이지만 그중 잘했던 것은 자신의 나약한 힘을 알고 흐름에 그냥 몸을 맡긴 것이 아닐까 싶다. 뭔가를 계속 잘해보려 아등바등 몸부림치다 더 깊은 물에 빠져 허덕이기도 한다.


가끔은 삶에서 밀레이 그림 속의 오필리아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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