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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연재 Jun 24. 2022

16. 미술관은 무용지물인 플럭서스 아트



HIGHLIGHT
플럭서스 아트는 1950년대 후반에 생긴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다. 플럭서스는 라틴어로 ‘흐른다’는 의미를 가지기에 물처럼 흘러야 하는 미술이다. 플럭서스를 대표하는 작가는 이름만 들어도 자랑스러운 백남준, 그의 스승인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요코 오노, 타카코 사이토, 앨런 케프로 등이 있다.




플럭서스 아트는 1950년대 후반에 생긴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다. 플럭서스는 라틴어로 ‘흐른다’는 의미를 가지기에 물처럼 흘러야 하는 미술이다. 정체되어 있거나 고리타분하게 옛날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전통 예술과 반하는 개념이다. 플럭서스가 다른 예술 운동과 차별화되는 부분은 국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며 디자이너, 작곡가, 아티스트, 시인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콜라보레이션 활동들을 실행했다. 요즘 시대처럼 장르를 구분 짓기 보다 경계를 흐린다는 점이 닮아 있다. 이들이 중요하게 여긴 부분은 아름다운 “결과물” 보다는 “흥미로운 과정” 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마무리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궁금증을 유발하는 신선한 충격이 없다면 뒤쳐지는 작품이며 엘리트 계층의 찬사를 받는 작품일 뿐이었다. 플럭서스를 대표하는 작가는 이름만 들어도 자랑스러운 백남준, 그의 스승인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요코 오노, 타카코 사이토, 앨런 케프로 등이 있다.



▲ 백남준과 부다 티비 (1974) 출처: 뉴욕 모마 미술관



플럭서스는 반-예술 (anti-art)을 지향한다. 기존의 예술은 고급예술로 여겨지며 엘리트 계층들의 전유물이었다. 특히나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을 향유할 수 있는 특정 그룹 사람들만의 공간이기도 했다. 지금 21세기인데도 미술관에 혼자 들어가면 쑥스럽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플럭서스는 다다이즘의 가치관을 계승하며 공산품 같은 레디 메이드나 특정 퍼포먼스나 우연적 이벤트를 실행하며 예술을 대중의 것으로 만들기를 추구했다. 연극적인 요소들과 시간이 개입이 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다 보니 미술관이라는 제한적이며 갑갑한 공간이 불필요했다. 미술관은 특정 작품의 사회 문화적 맥락을 모두 덮어버리며 디폴트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공간이기에 이들에게는 깡통 같은 곳이다. 플럭서스 작가들의 작품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요즘 열광하는 스트리트 댄스처럼 살아있는 날것의 미술이다. 



▲ 플럭서스 선언문



▲ 요셉 보이스의 1965년 작품인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방법”



시각적으로 충격적인 플럭서스 작품 중 하나는 요셉 보이스의 1965년 작품인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는 갤러리의 문들을 모두 잠그고 큰 창을 통해서 그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퍼포먼스를 시작한다. 머리와 얼굴에 꿀과 금박을 바르고 죽은 토끼를 품에 안은 채 손에 들고 있는 옆에 있는 그림들을 차례차례 설명해준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미술 작품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데 산 동물도 아닌 죽은 동물에게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다니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 놈은 미친 놈인가?’ 라는 리액션이 당연히 나올 법하다. 


요셉 보이스는 왜 이런 말이 안 되는 퍼포먼스를 한 것일까? 마치 샤머니즘 같기도 하고 예술작품이라 하기에는 예술 전통 규범을 깨부순다. 토끼는 다양한 전통이나 신화 속에서 상징적인 동물이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상징하기도 하고 크리스찬 종교에서는 부활의 의미를 가진다. 비록 육체는 죽어 있는 토끼지만 부활이 가능한 생명체이기에 시대가 변하면서 새롭게 깨어나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고 우리들의 사상이 변하는데 똑같은 예술만을 고집할 수 없기에, 보이스는 토끼라는 상징성을 통해 청중들을 자극시키려는 듯 보인다.


보이스의 얼굴에 칠해진 꿀과 금박은 각각 재탄생과 태양을 상징한다. 요셉 보이스는 꿀벌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집을 짓고 꿀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창의적인 과정과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벌이 꿀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 처럼 인간은 태생적으로 아이디어 자체를 만들었기에 우리의 문명이 발전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개념 자체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시각화 시켜줘야 한다고 믿었고 마치 샤머니즘의 한 장면 처럼 자신의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을 살아있게 만들지 않으면 죽은 것과 다름없으며 생각이 죽어 있는 인간에게 설명을 하는 것이 생명을 다 한 동물에게 설명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플럭서스 아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 공 같아서 단번에 이해하려 하는 것은 과한 욕심인 듯 보여진다. 또한 미술관이라는 제한적인 공감에 담기에 어울리지 않는 연극적인 요소와 생각지 못한 즉흥성이 존재하기에 포스트모던 아트 중 가장 살아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예술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 박제 되어버린 유물 같지만 이러한 플럭서스 아트의 개념 덕분에 특정 장소나, 작품의 재료에 관계없이 일상에서 작품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영상: 돌아다니며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요셉 보이스의 퍼포먼스

https://www.youtube.com/watch?v=3L5gIMHZ7_8




https://artlecture.com/article/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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