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 사이좋게 서로의 살을 뜯어먹기, 내 살은 안됨!
개복치다! 나 방금 죽을뻔했다!
속이 타서 벌컥 마신 아이스 바닷물의 얼음을 꿀꺽해 버렸다. 이제 저체온증으로 죽을지도 모르니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이며, 먹다 죽을 뻔한 이야기 시작한다.
파도가 울렁이고 소용돌이도 지나갔다. 그리고 찾아오는 한 달에 몇 안 되는 평화로운 시간. 칼퇴는 즐퇴다.
그러나 어림없지, 아귀가 한 마디 한다.
'엣헴, 혹시 오늘 회식하면 못 오시는 분?'
'저요!'
'개복치님 왜여, 이번에 많이 안 뜯어먹어요!'
'지난달 회식해서 뜯긴데 아직 새살 나는 중이라 오늘은 안 돼요!'
옆에서, 오징어군이 한마디 해준다. 신입이다.
'에이 같이 가시죠? 개복치님 오늘은 아무도 안 뜯어요'
망했다. 눈치 부족 신입이 또또 낄자리 안낄자리 모르고 들어왔다.
사실, 아귀랑 멀리 떨어진 끝자리로 앉으면 만사 오케이다. 배만 채우고 도망가면 되겠지.
아귀는 입도 커가지고 술이 아주 쉬지도 않고 들어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마에 달린 이상한 거나 흔들고 있을게 뻔하다.
아귀와 눈이 마주쳤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개복치님 진짜 안 가요? 이번에 성게볶음 진짜 맛있게 하는데 갈 건데?'
'물미역 냉면도 시켜줘요 팀장님, 그거 개복치님 원픽임'
오징어가 거든다. 아오 진짜 저 긴 다리 쭉 당겨서 입에다 물려주고 싶다. 역시 빨판 달린 놈들은 달라붙게 돼있다.
'자 개복치님 이 정도면 됐죠? 갑시다!'
그래, 희대의 현자, 제갈 꽁치도 삼고초려 끝에 강호로 끌려 나오셨더랬지.
이렇게 세 번의 거절 뒤에 머뭇거리며 수락하면 나도 현자다! 그래 못 이기는 척 수락!
‘흠, 메뉴는 나쁘진 않은 거 같군요.‘
멋있는 현자의 우아함이다. 덤으로 버틸수록 메뉴가 좋아지는 이상한 협상이다.
성게 따다 근육 빠진 거 보충 찬스!
하지만, 역시나 당했다. 아주 철저하다.
아귀가 바다회원카드 사용 장부를 늦게 봤다. 알면서 모르는 척했을 수도 있다.
'저기 오늘 성게볶음은 다음에 먹읍시다!'
'바다회원카드를 저번에 아이스 다시마랑 소라케이크 먹느라 많이 썼네요'
회식을 미룰 수 있는 마지막 찬스였지만, 아귀답게 밑장을 빼서 올렸다.
'그래서 오늘은 삼겹미역 먹읍시다!'
'?? 왜요? 한도 없나요? 그냥 다음 달에 모아서 하시죠??'
아오 진짜, 숨차서 말이 빠르지 못하니 또 템포에서 밀리네. 뽀꾸뽀꾸 참고 몰아쳤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일단 수락은 했으니 그렇게 끌려갔다.
삼겹미역은 가끔 먹으면 괜찮지만, 구울 때 기름 튀는 거 세상 질색이다.
불판 가까이 가는 것도 싫은데, 기름이 퉤퉤 튀면 피하기도 어렵다.
앞치마?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몸인지 경계도 애매한 나한테는 실례되는 말이다.
다 가려지지도 않고, 쓰고 돌아다니다 보면 나한테 주문 넣는 다른 바다 생선들도 종종 있다.
어찌 됐건 삼겹미역은 노릿노릿 잘 익어 간다.
막내 오징어군은 최신 트렌드 팔로워답게 안 굽고 먹을 준비를 마쳤다.
'개복치님이 구운 게 제일 맛있어요'
'예상했다 이 눔 자식'
애정을 듬뿍 담아, 삼겹미역을 전복등심살 굽듯이 미디엄 레어로 겉만 익혀 앞에 슬쩍 놨다.
넙죽 먹네? 내일 배 아플 텐데? 이 녀석 내일 일정 뭐더라?
생각해 보니 오징어는 폐막 회식까지 참석하는 정예 회식 용사다. 보나 마나 내일 연차다.
주는 대로 다 먹는 우리 막내, 불쌍하니깐 두 번째 판부터는 제대로 익혀줬다.
구우면서 지쳐가니 있던 식욕도 사라진다.
그냥 물미역 냉면이나 먹을 거다.
얼추 다들 배가 찼을 시간이 되자, 본격 회식 멘트가 시작된다.
참치 없는 회식이라 설마 했는데 여지없다.
아귀가 술잔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오글거려 죽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그 순간.
한물간 유행, 건배사다.
훗~! 성공적으로 회피했다. 아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대각선 끝자리를 앉은 나를 한없이 칭찬했다.
아귀가 술잔을 앞으로 들어 올리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불판의 기름을 피하는 듯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이미 몇 잔이나 마셨는지, 눈이 살짝 풀린 아귀는 눈 마주친 문어에게 건배사를 시켰다.
이 어찌 제갈 꽁치도 울고 갈, 지혜로움 아니겠나.
건배사를 했으니, 진정한 '회'식이 시작된다. 일단 한 명을 타깃으로 의미 없는 농담이 오고 가다가, 갑자기 살을 뜯는다. 하지만, 1차에서는 물었던 살을 삼키지는 않고, 다시 붙여주는 척은 한다.
오늘은 건배사가 맘에 안 들었는지 문어군이 대상이다. 하지만, 다리도 많으니깐 지혜롭게 하나만 내어놓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1차가 끝났다.
도망갈 타이밍이지만, 또 망했다.
가장 안쪽자리 아귀와 멀어지려고 앉았던 안쪽 구석은 도망칠 때 악수가 될 수도 있다.
마지막에 나가게 되면 아귀의 어깨동무를 당하기 딱 좋은 자리였다.
'화장실, 화장실!' 다급하게 찾았지만 하필 출입문 반대편이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물미역 냉면을 후루룩 하던 5분 전의 내가 밉다.
일단 화장실에 숨어있다 도망가기 작전은 실패가능성이 높아졌다.
순순히 잡혀주는 게 일단 상책일 수 있다.
술이 들어가 흐물거리는 아귀가 어깨동무를 하고 기댄다.
'어이구 우리 든든한 개복치님!'
부아가 치밀지만, 오늘은 제갈 꽁치처럼 굴어야 한다.
'어디로 모실까요 고객님?'
제갈꽁치는 이렇게 조기조기를 속였던 거다. 화가 나도, 현자라면 멋있게 참아줘야 한다.
일단 오징어가 손짓한다. 2차는 어김없이 맨날 가는 그곳, 역전할머니를 넣어 만든 보리즙이다.
그래, 오래된 인간의 맛은 참을 수 없지.
2차 장소에 도착하자 본격 '회'식이 시작된 듯하다.
'자 이제 우리 2차는 그동안 못다 한 진지한 이야기 좀 해봅시다!'
어휴 진지하게 반영이 안될 진지한 이야기 타임이 시작되었다. 맨 정신에 진지한 이야기 못하는 물고기들은 꼭 술이 들어가면 용감해진다.
혀가 꼬여가며 무슨 진지한 이야기냐, 자기가 한 말 기억도 못할 거면서.
듣기 싫은 대화들이 오가는 동안, 억지웃음이 한계에 도달했다.
화장실로 피신했다가, 나오는 길에 살짝 눈치 보고 빠져나왔다.
달달하고 시원한 게 먹고 싶어졌다. 속 시끄러울 때는 아이스 성게알 초코맛이지.
행복하다. 회식 중에 혼자 먹는 달달한 맛.
그렇게 밖에서 둥둥 떠있다가 다시 자리로 가서 앉는다. 어차피 술이 들어가서 얼마나 비웠는지 관심들도 없다. 앉으려고 버둥대는 사이, 모두와 눈이 마주쳤다.
흐흐 이것들 나 없을 때, 내 얘기하고 있었나 보다. 어색한 정적이 3초 정도 흐른다.
멋진 희대의 처세술을 보여줄 때가 왔다.
'뭐해요 다들 보리즙 뜨뜻해지게 한잔해!'
'위하여!!'
'(뭘?)'
다시 시끄러워진다. 이제 30분만 버티면 된다. 광역버스 핑계를 꺼내기 딱 좋은 시간.
몇 번이고 말해서 단골이 된 멘트도 준비했다.
'목요일은 지금 시간에 가도 자리가 없을 수가 있어요'
구차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자 무보수 노동이라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걸로 끝이다. 그 30분이 30년 같다. 안 궁금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지난번 일은 누가 누구 살을 먼저 뜯어서 그렇게 된 거다, 아니다 내 살이 먼저 뜯겼다.
아웅다웅하다가도 금방 또 화해한다. 이번엔 다른 팀 이야기로 번진다.
집에서 TV나 보고 있을 그들의 살이 뜯긴다. 회식이란 이런 거다.
술이 들어가면, 남의 살을 뜯을 수 있는 기회가 갑자기 주어진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듯하며 당당해진다.
먹이활동 중에 잘못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남이 실수했으면 가서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면 되는 것을 술자리로 와서, 생선의 살을 뜯는다.
전해야 할 마음이 비뚤어지고, 결국엔 서로 살을 와구와구 뜯어먹고 마는 걸 볼 때면, 생선들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그래, 회식은 사실 술 좋아하는 물고기들의 공식적인 휴식 루트라는 것도 이해는 한다. 그냥 늦게까지 마시면 토끼 같은 마누라가 뒷발로 차버릴 테니까.
요즘 바다는 이런 2차까지 강제 회식을 잘 안 하긴 하지만, 아직도 좋아하는 물고기들도 간혹 남아있는 듯하다.
그냥 바다회원카드 님들끼리 써도 되니깐, 술 싫어하는 사람 억지로 참여시키는 문화는 좀 그만했으면 한다. 자신들과 술 한잔 못한다고 일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프로답게 일하고 돈 벌러 만난 곳에서 정 따위 운운하지 말자는 거다. 회식이 없어서 안 돌아가는 조직은 없다. 회식하려고 회사 온 게 아니지 않나? 1년에 한두 번이면 충분하다. 매달 하고 싶으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해도 된다.
그리고 친목을 다질 거면, 일이야기 그만 좀 하고 생선 냄새나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술 싫어하면 앉아만 있어도 노동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사실 회식은 리더가 아무리 재밌게 하려 해도 이미 재미없다. 억지웃음을 업무 외에도 보고 싶은 거라면, 몸속에 뼈대가 아닌 꼰대가 있는지 살펴봤으면 한다. 팀원 모두의 진짜 웃음을 보고 싶으면, 리더도 말랑 살 내놔라. 맛이라도 보게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