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그 자체가 영화
내 인생의 표지를 고르는 중
도서관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 나는 천천히 책등을 훑는다. 손끝이 스치는 활자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가끔은 제목 하나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치 제목이 표지를 당겨 오듯, 나는 그 표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표지에 위에 깃든 색감이 한 장의 사진처럼 시야를 물들인다. 손끝에 전해지는 질감이 마치 낡은 일기장을 펼칠 때의 감촉처럼 다가온다. 그 순간,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이 살짝 고개를 든다.
만약에... 책을 고르듯, 누군가 내 인생을 집어 든다면 어떨까.
표지를 만져 보고, 제목을 읽고, 잠시 서서 나라는 책을 펼쳐 볼까 말까 망설인다면... 그 순간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떤 문장이 그들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을까.
나는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했다. 어릴 적 꿈속에 서점 주인이 등장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소설가, 시인, 수필가, 도서관 사서, 라디오 작가로 변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형태가 어떻게 바뀌든 그 꿈의 중심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다.
책장에 진열된 책들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별것 없던 하루가 특별하게 변하곤 했다. 그 표지 사이로 나의 인생을 끼워 넣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의 인생을 담은 책은 한 번 읽고 나서도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책일까. 아니면 책장 한 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 책일까.
그 물음 끝에서 또 하나의 생각이 스민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어떤 제목을 붙이고, 어떤 표지를 내세울 수 있을까? 아마 그 제목 속에는 춘천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움처럼 숨어 있을 것이다. 표지는 내가 지난 계절들을 건너며 찍어 온, 수천 장의 춘천 풍경 중 한 장이 될지도 모른다.
소양강 위로 번지는 저녁빛일 수도 있고, 골목 끝에서 불쑥 마주친 능소화일 수도, 혹은 겨울 하늘 아래 고요히 서 있던 나무일 수도 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그 순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건네줄 수 있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모아 두었던 풍경들.
그 안에는 내가 걸어온 계절의 공기와 그날의 날씨, 마음의 결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렌즈 너머로 바라본 춘천은 늘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짓는다. 때로는 나를 위하는 친구처럼, 때로는 낯선 여행지처럼 다가온다. 결국 내가 찍은 사진들은 내가 살아낸 하루들의 합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나'라는 책을 펼쳤을 때, 그 안에 담긴 풍경 속에 녹아 있는 내 마음까지 읽어내길 바란다.
삶은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그 표면에는 매일 다른 빛이 부서진다. 어느 날은 잔잔한 윤슬로, 어느 날은 빗방울이 만들어 낸 파문으로, 또 어느 날은 바람이 멀리 밀어 보낸 물결로. 그 모든 순간은 곧 다시 평온을 되찾지만, 잠시 스쳐간 반짝임은 오래 기억 속에 남는다.
나의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길 바란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나의 이야기가 잠깐이라도 누군가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 특별함이 꼭 거대한 감동일 필요는 없다. 책장 속 깊이 묻혀 있던 오래된 책을 꺼내듯, '나'를 발견해 준다면... 입바람을 후- 하고 불어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 주는 그 순간, 나는 조용히 첫 장을 내어줄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의 페이지를 넘겨준 손길이 마치 오랜 벗을 다시 만난 듯 머뭇거리다 미소를 짓는다면,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싶다.
"안녕? 고마워. 덕분에 내 인생이 한 페이지 완성됐어."